너무 당연한 것 같은데.... 이런 걸 유명한 코수스 같은 사람이 말했다면서 배우면 태영씨가 말한 것 처럼 한 사람에게 너무 절대적 위상을 부여하는 이쪽의 특성에 대해 ... 정통사학?은 내러티브와 팩트로 승부하는데, 미술사 미학은 추상적인 걸 다루니까 (추상적이라고 해서 고급단계의 논의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없는 비평준-다원화된 담론의 장은 아니다. 분명히 미적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18세기 센티멘탈 논의의 반복같지만...나는 다원화되는 현대미술에서 여전히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은 그 잣대, 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진정한 작품이고 의미와 울림을 주며 그것이 오래갈 수 있는 고전이 될수 있는가 하는-) 벤야민과 바르트 이야기만 봐도 그걸 왜 어려운 말로 바꿔서 길게 설명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핵심은 하나인데. 나는 이걸 할 뇌구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이런 때다.

> 일반 대중들과의 소통 간으성은 적어도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작품의 필요조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셉 코수ㅡ는 공공미술 작품에 대한 비전문관객들의 접근 가능성에 대해 심지어 다중이 공유하는 장소에서 작업하는 데에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 존재하며, 작가는 일정 수준의 획득 가능한 의미를 제공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고까지 주장....

"컨텍스트에 적합한 공공미술"

Joseph Kosuth, Public text, in Florian Matzner, ed. Public Art, 2001. p.304.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분명히 주장할 수 있다. 즉 한정된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 공공미술 작품의 예술적 의도가 전달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미술사 내부의 문제의식에서만 비롯되는 것- 소위 당대 미술의 자기 지시적 self refrential 성격이어서는 안된다. 더욱이 비평은 실종되고 대중들은 이해를 포기해버린 미술이 처한 동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대중들을 대화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공공미술은 작품수용의 컨텍스트에 밀착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설득력을 지닌다. 상품 시장에서 통용되는 사용자 중신 user-oriented 의 사고가 공공미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흔히 뷔렌의 기둥들이라고 칭하는 다니엘 뷔렌의 팔레 루와얄의 조형 설치물 <두개의 무대> 1985-86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적절한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보인다. 


3. 수용자가 주인이 된 미술


영감받은 천재, 예외적 개인과 같은 낭만주의 미학의 모델에 의거한 작가의 이미지는 공공미술적 실천에서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 보인다. 

 물론 수용자가 중심으로 부각되는 현상은 영구 설치보다는 일시적인 프로젝트로 그리고 오브제보다는 담론과 과정으로 무게중심이 옮겨 온 공공미술의 관해이 정착되는 과정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역사적 압아가르드의 빛바랜 윤리적 이념에 그치고 말았던 예술과 삶의 통합의 당위성이 네오 아방가르드에 있어 예술 창작의 민주화란 기치 아래 부활된 것 마냥 모두가 예술가라는 일종의 문화 포퓰리즘과 같은 이념은 여기서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지역 공동체 기반의 미술 프로젝트나 관람객 참여형 프로그램의 경우 구상만이 작가의 몫. 실현은 수용자에게 전적 의존


최근 프로듀서로서의 매개자역할은 작가의 단순한 협업자 이상으로 집단 창작 또는 공동 창작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새로운 형식의 공공미술 실천과 더불어 야기된 작가의 위상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이제 작가는 절대적 창작자의 자리를 내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도 비로소 수용자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작가가 수용자의 위치에 서지 않고는 공공 미술의 실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 방학때 수용미학 같이 공부한거. 발터 벤야민..논의 다시 미학대계에서 복기할 필요 있음 ㄱㄱㄱ

>>> 디지털 아트 읽다가 나옴.


발터 벤야민이 1936년에 지적한 바대로, 기계적 복제 예술은 종래의 순수 예술의 아우라를 제거하고 예술을 종교로부터 해방시켰다. 다시 말해 전통적 회화는 그 유일무이성으로 인해 종교적 가치에 필적하는 예술의 고유한 가치, 즉 아우라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복제기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사진 및 기타 미디어 아트는 쉽게 복제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아우라를 상실하였다. 벤야민은 아우라의 상실을 예술사에서의 진보로 판단한다*** 즉 예술은 오랫동안 종교에 기생하던 방식을 버리고 현대 대중사회에 걸맞는 민주주의적 존재 방식을 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체의 디지털 아트는 예술의 일회성, 유일무이성을 부인하는 복제예술의 한 형시깅다. 그러나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예술작품들은 실제하지 않는 존재를 재현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복제 예술과는 다른 관점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독자가 곧 저자라 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을 때 그는 텍스트들 간의 상호텍스트성을 염두해두고 있었다. 즉 각각의 독자와 가긱 다른 읽기를 새로운 쓰기로 간주하면서, 바르트는 독자와 저자의 구분을 붕괴시킨다. 실제로 창조자의 역할을 관람자에게 부여하는 상호작용적 디지털 아트는 그의 저자의 죽음 개념을 문자 그대로 구현했다 할 수 있다.

 - 우리도 생각자유롭게 말하고 인정할 권리만 있다면 충분히 이정도는 생각해낼 수 있을듯. 대단한 아이디어다,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다하며 신격화시켜서 저작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을 못하고 저 말을 새로운 말로 바꿔 논문써대는걸 보면 정말 상대적으로 의미가 없으니 가난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과거에 대한 해석, 사료들을 모아 안개를 조금이나마 걷어내는 진정한 사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의미있는 연구. 의미있는 것. 상대적이지만 절대적인 것에 가까울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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