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대계 2: 1920년대 정치적 상황 및 이론사적 상황과 철학의 문제: 잃어버린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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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직후의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희망찬 확신과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피살로 마감되는 독일에서의 스파르타쿠스 사건을 마지막으로, 1920년대 들어 서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지연, 불발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실종될 조짐까지 보이게 된다. 서유럽 선진 국가들 가운데서의 자본주의 사회가 노정할 수 있는 모든, 정체/경제적 위기 상황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

이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여성혁명가

[Rosa Luxemburg]

출생 - 사망1871.3.5. ~ 1919.1.15.

1919년 1월 15일 베를린. 150cm가 넘을까 말까 한 신장에 다리가 불편한 한 40대 여인이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휘두른 총의 개머리판에 두개골이 으스러지도록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그대로 다리 위에서 운하로 버려졌다. 독일의 11월 혁명 정국 속에서 우파 의용단에게 살해당한 이 왜소한 중년 여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그녀는 20세기 초, 러시아와 독일의 혁명을 주도하며 새로운 자유와 평등 사회를 꿈꾸던 정열의 혁명가이자 마르크스 이래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일컬어지던 탁월한 이론가였다.

타협을 모르는 불굴의 이상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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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그녀가 몸담았던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획득했던 시기였다. 그녀를 살해한 군인들도 11월 혁명을 이끌어 제정을 무너뜨린 세력이었다. 얼핏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세력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서둘러 체포하고 재판도 없이 무참히 살해한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인물이 가진 타협을 모르는 순수 사회주의 사상과 그녀의 폭발적 행동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집스러울 만큼 자신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혁명을 제대로 된 방법으로 100%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상적 혁명 달성은 공감하지만 과정의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라던가, 혹은 시대가 변했으니 그에 맞게 이론을 새롭게 수정해야 된다는 주장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에 맞서 순정한 혁명정신을 부르짖었다.

그녀는 순수한 국제주의자였으며 평등주의자였고 민주주의자였다. 그러기에 그녀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계급해방의 노선을 택했고, 혁명달성을 위해 직업적 혁명가의 독재를 정당화하던 레닌과 맞섰으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사회주의 이론을 수정,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것을 주장한 베른슈타인과 이론 투쟁을 벌였다. 그녀는 노동자 스스로가 만든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세계를 꿈꾸었으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대다수 그녀의 동료들은 상황과 자기논리에 맞추어 변해갔고 결국,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그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결국 그녀가 독일 사회민주당과 결별해 독자적인 급진적 혁명당 스파르타쿠스단을 만들고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민주당과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위태로웠던 공존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한 세력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적들과 동료들이 두려워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꿈꾼 세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녀가 옥중에 있으면서 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써놓았다.

인간다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것은 확고하고 명쾌하며 명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랑하다는 것을요. 흐느끼는 것은 약하다는 표시예요.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화창한 날을 맞을 때마다, 아름다운 구름을 볼 때마다 그것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러시아 식민지 폴란드에서 태어난 다리를 저는 유태인 여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세계사를 뒤바꿀 거친 혁명의 세계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출신과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던 나라 폴란드(당시는 러시아의 식민지였다)에 사는, 유럽인들로부터 천대받던 유태인(그렇지만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다. 이것 또한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이론가의 출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이었고 여성의 인권이 가정에서부터 존중받지 못하던 19세기와 20세기 초를 살아가는 여성이었다. 거기다 어렸을 때 앓은 병으로 다리가 불편하였고 그 탓에 신장도 그다지 크지 않은 왜소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자신의 불리한 입장과 연약함을 무기 삼아 가정에 눌러앉아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로자 룩셈부르크였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핸디캡을 극복하고 이를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폴란드의 유태인이란 그녀의 출신은 일찍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민족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국제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게 했고 불편하고 왜소한 몸과 여성이라는 입장은 그녀를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계층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하여 당시의 혁명가나 이론가들이 쉽게 유혹받던 왜곡된 권력욕으로부터 그녀를 해방시켰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청소년 시절 명석하고 뛰어난 두뇌로 이미 6개 국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던 우수한 학생이었던 한편, 식민지 폴란드를 탄압하는 제정 러시아에 항거하는 반정부운동에도 일찌감치 가담하고 있었다. 고교 졸업 무렵 수배대상이 된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을 하게 되고 그곳 대학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땄다. 또한, 그녀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레오 요기헤스를 만났고 본격적인 사회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98년 구스타프 뤼베크란 독일인과 위장 결혼하여 독일시민권을 취득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2차 인터내셔널에 참여하게 되고 사회주의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러시아의 1차 혁명에 고무받아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로 돌아가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면서 폴란드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 반목하였다. 국제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족주의를 매우 경계하였는데 그녀는 민족주의나 민족의 독립이란 미명이 계급의식을 흐려 결국 계급해방을 방해하고 국가간, 혹은 민족간 이기주의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매우 정확하게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폴란드의 독립보다는 계급 해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에 대해 일부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그녀가 폴란드의 독립을 방해하기 위해 러시아 짜르가 보낸 첩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이 폴란드에서의 활동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베른슈타인과 레닌에 맞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수정주의 논쟁을 펼친 베른슈타인. 
<출처 : St.Holz at en.wikipedia.org>

이에 앞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의 사회민주당 내에서 당내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던 베른슈타인과 이론 논쟁을 펼쳐 그의 수정주의 노선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엥겔스의 친구로 마르크스 사후 독일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베른슈타인을 상대로 20대 후반의 로자는 끈질긴 이론논쟁을 거듭하며 그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란, 자본주의의 자기발전과정을 인정하고 그에 맞추어 마르크스주의를 수정 적용하자는 이론이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자체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정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곧이어 붕괴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신용제도, 카르텔, 트러스트, 완벽한 통신기술 등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적응수단 때문에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노동자들의 무장봉기나 급진적 혁명 같은 물리적인 방법보다는, 개선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조합이나 의회 진출 등을 통해 비판세력으로서 사회주의를 적용하고 점진적 전진을 통한 권력 획득을 주장하였다. 이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라는 논문에서 혁명의 필요성을 사회주의의 정설로 항변하고, 베른슈타인이 말한 의회 진출을 통한 점진적인 사회주의 권력 장악은 공상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이 말한 자본주의의 적응수단이야말로 신속한 자본주의 발달과 이에 따른 자기모순에 의한 붕괴를 초래할 요인이며, 식민지 등 자본주의가 착취할 영역이 더 이상 없어지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붕괴는 필연이라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을 더욱 첨예화하여 혁명을 통한 권력 획득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장이었다. 노동조합이나 의회 진출 등 수정주의의 방법론은 노동자를 노동의 영역에 제한함으로써 그 정치적 힘을 박탈하여 자본주의를 돕고 혁명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비판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당 조직론에 대해 논쟁한 레닌. 
<출처 : SF007 at en.wikipedia.org>

그녀는 사회주의로의 길은 오직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 즉 혁명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눈앞에 현실보다는 이상에 바탕을 둔 확고하고도 순정한 그녀의 주장은 제2인터내셔널에서 받아들여졌고 수정주의는 사회민주당의 공식적 노선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변화하는 시대상 속에서 수정주의는 실제적인 노동 현장에서 계속 그 명맥을 이어갔고 급진적이고 물리적인 혁명에 회의하던 상당수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로자 룩셈부르크의 결벽증에 가까운 노동자 중심의 혁명이론은 레닌 비판에서도 나타난다. 레닌이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직업적 혁명가에 의한 혁명 주도와 정당조직의 규율화를 강조한 데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많은 우려를 표명했다. 그녀는 모든 혁명은 엘리트혁명이 아닌 대중운동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대중에 의한 파업과 운동은 객관적인 사회상황에 대한 반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화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혁명이 이루어지리라고 본 것이다.

그녀는 레닌의 혁명이론이 볼셰비키의 독재와 관료화로 흐를 것을 경계하였고 실제로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 이루어내는 혁명의 가치를 가장 고귀하고 숭고하게 생각한 혁명가였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범하는 오류는 가장 우수한 중앙위원회의 완벽성보다도 역사적으로 훨씬 더 풍요롭고 귀중한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해방이 아니면 안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스파르쿠스단의 결성과 최후

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연설에서 당시 독일의 황제이던 빌헬름2세를 비판하였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1년간의 옥살이 후 출소한 그녀는 새로운 정치적 전개를 목도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전부터 늘 경계하던 민족주의와 수정주의가 한꺼번에 독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팽배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세계전쟁이었다. 국가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당장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와 민족의 안위에 대범할 수 없었던 독일의 사회민주당원들은 계급문제를 뒤로한 채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사회민주당은 전쟁을 지지하는 독일사회민주당과 그렇지 않은 독립사회민주당으로 분열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적기>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훼절된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논설을 써서 그들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급진적인 혁명파들의 중심에 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과거 로마시대 노예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딴 스파르타쿠스단(독일 공산당의 전신)을 결성하고 급진적 혁명을 위한 활동을 해나갔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11월 혁명이 일어난다. 이 혁명은 패전책임론과 사회주의자들의 반발, 전쟁으로 인한 민중들의 궁핍 속에서 킬 지방의 수병들의 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제정은 무너졌고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혼란스러운 혁명정국에서 정권을 잡은 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우파들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장례식중 장례 행렬 모습. <출처 : German Federal Archives>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순정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불완전한) 혁명정국으로부터 단숨에 노동자 중심의 온전한 혁명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19년 1월 1일 스파르타쿠스단을 독일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사회민주당을 돕는 우익 군인들의 손에 진압되었다. 많은 급진적 혁명가들이 체포되는 과정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베를린 경찰 최고직을 장악하고 있었던 보수적 의용단(Freikorps)에 잡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체포된 후 심한 욕설을 들으며 개처럼 끌려 다니다가 머리를 강타 당하고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시신은 운하 속에서 잠겨 있다가 그해 5월에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은 나치의 집권기에 한 차례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90여 년간 꾸준히 그녀의 이상을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2009년 베를린의 한 병원 지하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으로 보이는 시신 한 구가 발견됨으로써 현재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 그녀 본인의 것이냐는 논쟁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사상이 한물 간 유행가처럼 들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품고 죽은 탁월한 혁명가로 기억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로자 룩셈부르크가 최후로 쓴 글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 - 이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여성혁명가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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