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집어들어서 두어시간 정도동안 읽은 책. 박영욱 선생님이 참가하셔서 샀는데, 좋은 내용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감정표현이 과해서 아쉬운 책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세월호 사건을 둘러싸고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양분된 의견들이 갈등하는 지 모르겠다.

잘못된 건 밝히고, 왜 당장 구조하지 않았는지, 왜 인양하지 않았는지, 사건이 터지고 대통령을 뭘 했는지.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생각은, 이 사건을 사고로 간주하고 한해에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만 몇만명인데-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

이건 정부에서 응당 즉각적으로 대처했어야 했고, 그 미흡한 대처로 인해 한번에 삼백여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시시각각 보도되었다. 가라앉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육지의 사람들이 함께 했다는 거다.


p.11 배타적 편향성을 부채질하는 편향적 유대 문화의 가공할 위력. 제대로 된 앎이 이루어져야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 도덕적 직관주의 / 공감의 확장. 앎의 쓰임은 인지적 차원에만 있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도덕적 직관이 공감의 형식으로 공명할 때 비로고 구현 가능. 


김성우, 일제 강점기와 분단, 한국 전쟁 모두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 말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온누리교회 목사. 이슬람, 미국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다를 바 없어. 테러, 학살, 침략을 신의 계시, 사명으로 생각하는 것은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


신약성서의 어느 부분에서 예수가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적 있는가. 예수는 도리어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니님에게 라고 말하며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뒤섞지 말 것을 요구한다.


연효숙, 김장훈의 진실성: 죽은 이보미양이 부른 거위의 꿈 영상에 자신이 부르는 영상 편집해 합성.


주디스 버틀러- "애도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폭력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삶에 대한 더욱 예리한 느낌을 잃게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박영욱, 역시나 다양한 장르(미술)을 오가며 철학적 개념을 사건을 둘러싼 논의에 적용. 사회 표면에 감춰진 무의식. 러시아 구성주의자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 객관과학적 세계관을 카메라가 대변한다고 봄. 에이젠슈타인 몽타주 영화 거부함. 리시스키, 타틀린, 긴즈부르크 등이 기하학적 추상 몰두한 것도 형태야말로 가장 탈주관적이고 과학적이라고 믿었기 때문. 


호르크하이머 등 독일 비판이론가들의 테제가 보수 논리 되어버린 현실. 그것이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 오늘날 미디어사회에서 여실히 드러남. 그들, 미디어가 대중 비판의식 고갈시키고 천박한 포퓰리즘 도구가 되었다고 함. 진보는 반대로 현실 고발 강조. 그러나 미디어 그 자체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야.


일베충이 혐오하는 건 정작 보수/진보라는 잣대일 것. 그들에게 혐오의 대상은 오늘날 병폐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면서도 모든 원인 보수세력으로 돌리는 진보진영. 보수가 대놓고 꼴통 짓 한다면 진보는 사회악 만드는데 일조하면서 모든 악을 보수로 몰아붙이는 위선적 행위한다고 생각. 이를 냉소와 혐오로 표현하는 것... 안희정, 이재명만 봐도...


데리다가 언급했듯 햄릿의 유령은 그저 헛된 망령이 아닌 햄릿 자신의 내면이자 실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은 허구가 아닌 자본주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실상일 것. 트라우마된 것은 미디어 탓이 큼....이라는데 사실 그닥 트라우마가 아니라... 모든이에게 트라우마라고 생각하는 것도 좀 불편했음. 제일 좋았던 글 두개 중 하나긴 했지만, 중간중간 모든 사람들이 그정도의 충격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거라 단언하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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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5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을 감시와 처벌의 시각으로 보는 정치권력은 자신의 존립 기반을 망각한 권력. 


최종덕 샘 글도 좋았음. 은폐와 광신의 정치학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가난한 유물론자, 포이어바흐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

포이어바흐(LudwigFeuerbach), 1804~1872

유명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넉넉한 집안에서 모범생 시절을 보냈던 포이어바흐1)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하다가 이에 실망하고,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어느 포도주 집에서 헤겔과 마주쳤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할 정도로 수줍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대학교수가 되려 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자 “나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철학교수로는 적당치 않다”라는 말로 스스로 위로하며 대학을 떠났다.

한때는 아내가 경영하는 도자기 공장 덕분에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저서를 통해 유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물질을 무엇보다 강조했던 유물론자가 그 물질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겨우겨우 생을 이어가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식물인간이 되었고, 마침내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가난한 유물론자, 포이어바흐 본문 이미지 1

포이어바흐는 먼저 “헤겔이 말한 절대자란 그의 철학 안에서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말라죽어 버린 신학의 정신, 즉 성령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했다. 이어서 그는 헤겔을 극단적인 관념론자라고 선언해 버렸다.

헤겔은 우리가 만질 수 있는 감성적 · 질료적인 것을 말하긴 하지만, 그것을 어디까지나 개념(사유)을 통해서만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사물)들이 우리의 감각을 통해 알려지는데도, 헤겔은 감각을 철저히 무시해 왔다. 그러므로 이제 감각에게 본래의 권리를 되찾아줘야 한다는 것이 포이어바흐의 생각이다.

물론 정신이 우리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한쪽(정신)만 보고 다른 쪽(물질, 육체)을 보지 못하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 육체를 규정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정신 세계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육체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포크트는 “인간이란 그가 먹는 대로 된다”2)라고 말했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은 피, 심장, 두뇌 그리고 정신 기능이 되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진실로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것은 신이나 존재의 개념 등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이 느끼는 것, 즉 소여()3)다. 신이란 감성적인 것과 유한한 것이 신비화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종교란 신이 실제로 존재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고 싶어 만들어낸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에서 발생했다. 인간의 행복하고자 하는 본능이 신을 만들어냈다. 인간은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없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상태, 즉 전지전능하고 영원한 행복의 상태를 절대자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신이란 인간의 소망이 현실적인 존재로 탈바꿈한 것에 불과하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종교를 통해 우리의 소망을 충족시키려는 유치한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제부터는 종교의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행동 가운데서 인간의 소망을 실현시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난폭한 자연의 위력이나 맹목적인 우연의 힘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이다. 이제 문제는 신이 존재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느냐 않느냐에 달렸다. 철학은 유신론을 버리고, 인간학(anthropology)4)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진정한 철학은 인간학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 인간학이란 추상적인 관념론의 입장이 아니라, 구체적인 유물론의 입장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유 속을 헤매는 유령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존재하며 행동하는 인간에 관한 학문이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포이어바흐가 말하는 인간학적 유물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난한 유물론자, 포이어바흐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2008. 7. 15., 평단문화사)



* 가능성은 상충한다. 비극적 아이러니. 

: 죄는 무죄와 완전히 무관한 것이 아니라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일에서 완전히 잘못하거나 완전히 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 잘한 것이면서 동시에 어떤 점에서 잘못하는 것이다. ... 결국 문제는 갈등의 변증법이고, 이 갈등 속에서의 어떤 고양적 가능성이다. p.84


* 그래서 삶에서의 갈등은 하나의 부당성과 또다른 부당성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다른 정당성 사이의 충돌이고, 그 때문에 손쉬운 해결책 없는 난관이 발생하며, 이로인해 비극은 불가피하다. 안티고네의 행동이 보여주었듯이, 자기 길로의 결단이 행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길이 단순히 보복이나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을 위한 관용과 화해의 시도라는 점이다. 이때의 화해가 그러나, 거듭 강조하여, 손쉬운 화해일 수는 없다. 그것은 온갖 모순과 충돌을 뚫고, 불화와 차이를 견뎌낸 화해이다. p.103


* 고요의 쾌활성

: 더 높은 정신의 쾌활성. 더 높은 영혼. 이것은 운명을 견디는 내면적 쾌활성에서 온다. 갈등과 싸움 속에서 더 나은 삶의 상태로 나아가려 하는 것. 파토스는 그런 이행의 움직임이요 이행하려는 주체의 독립적 의지이다. 


* 자기 형성의 문화능력

: 문화라는 말, 계발하다, 가꾸다에서 온 것 고려하면, 문화란 개념이 교육과 형성의 핵심적 사안. 대상은 우리 마음과 심성, 성격과 자질. 



* 탈각화 과정은 계속적인 물음의 과정. 잘 생각해보라. 철학은 이 물음의 경로 보여줌. 

실패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 삶의 불확실성으로 자기 자신을 던지며 결행하는 이 자유의 행동. 현 상태와는 다른 어떤 질서로 나아가고자 하는 힘이야 말로 자유의 행동.


* 그 의지란 반성적 의지이고 성찰적 에너지. 


* 성격 형성의 윤리학

: 자기 감정에 대한 관심, 감정의 정식성에 대한 관심

: 좋은 감정은 이성적으로 검토된 감정. 감정의 이성화. 이성화된 감정. 목표는 개체적 독자성.

: 파토스는 동사인 paschein 고통받다에서 옴. 주로 포이에시스라는 말과 대조되어 고찰딘. 포이에시스는 만듦 혹은 하기. 

: 윤리적 파토스를 위해 삶의 근본 한계에도 불구, 한계 너머의 더 진실하고 선한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고 이 점에서 삶의 고양된 가능성 실현될 수 있다.

: 좋은 감정은 감성적 감성을 넘어서 논리적으로 검토되고 사유적으로 여과된 감정. 이것은 이성적 감성으로 감정 자신을 돌아보는 능력, 반성적 능력이 들어 있음. 

: 좋은 감정은 감정을 합리화, 이성화 논리화 하는 것이고, 체계적인 논리 부여하여 감정을 도덕적으로 선하게 만드는 일. 


* 공감

: 고통 받는 자의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연민.

"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은 쉽게 동정 받거나 위로 받길 원하지 않는다. 비극적 공감은 우연하고 변덕스런 가치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높은 불가침의 도덕성 혹은 도덕적 불가침성에 대한 공감. 윤리적 정당성이야말로 공감을 참으로 공감다운 것으로 만든다. 비극적 주체 역시, 비극에 공감하는 관객이 그러하듯이, 값싼 동정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려고 한다. 자기행동에 대한 자발적 책임부여, 바로 여기로부터 자유는 시작한다. 


* 비극작품을 읽는 이유

: 좋은 감정의 연마, 바른 성격 내면화에서 시작. 비극적 인식은 자신과 그 주변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진짜 교양서만 너무 읽는 것 같다...머리가 점점 주변부 지식으로 채워지지만 정작 깊어져야 할 중심부는 비어가는 기분. 그렇지만 뭘 공부해야할 지 모르겠는 걸.... 이 책을 읽으면 너무 공감가지만 반대로 너무나 기본적인 태도만을 이야기해서... 이걸 분석한 분은 대단하지만, 읽는 나는 수없이 들어온 원론적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라, 지금 이런거 보고 있을 떄가 아닌데- 하는 촉박한 기분이 들고야 마는 것이다. 모쪼록 좋은 책이긴 하지만(빋고 읽는 문광훈 선생님 책이니깐.) 뭔가 5줄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책 같았다... 책 디자인 이쁨...

인간의 문명사에서 기록된 것은 잊혀진 것들의 바다 위에 찰랑이는 하나의 물결에 불과하다. 만의 하나라도 그가 위대하다면, 그것은 이런 자신의 사소함과 변덕, 무기력과 허황됨을 깨닫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극적 한계의식은 삶의 이런 자기모순에 열려있다. 예술의 정신은 이런 모순의식 속에서 타자적 지평으로 나아간다. 이런 한계조건에서 우리는 언어의 불완전성이나 욕망과 충동의 불합리성과 같은. 인간의 크고 작은 결함과 맞닥뜨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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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과 현실, 믿음과 실상 사이에는 어찌할 바 없는 간극이 있다. 그리고 그 #간극 #사이에 자리한 심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너무나 많은 #고통과 회환과 #절규 가 담겨있다. #비극 은 이 한계조건으로서의 고통을 담는다. 이 불가항력적 한계조건 앞에서 비극적 주체는 한계의 조건을 의식하고 응시하며 헤아리고 가늠한다. 그리고 그렇게 가늠하는 가운데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면서 그 행동의 결과에 책임지고자 한다. 이 점에서 그는 윤리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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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또 인간의 #자유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선한 마음이 혹시 있다면, 그것은 그 후에야 찾아드는 과실인 것이다. 자유는 독단에 대한 자기응시의 용기에 있다. 자기모순의 의식과 #좌절한 #사연에 대한 #존중이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비극적 주체는 책임의 이 두렵고도 험난한 이행 속에서 자신의 성향과 기질을 조금씩 연마해간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수련과정이다.


비극에서 충돌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허위와 하나의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진실과 다른 하나의 진실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각각의 진실은 완전한 정당성이 아니라 #부분적 정당성이라고 해야 한다. 부분으로서의 한 진실과 부분으로서의 또 하나의 진실이 서로 싸우는 것이 비극적 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갈등은 점점 격화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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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 속에서 이 대립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립과 대결하는 가운데 "주체성의 강렬함과 깊이"는 얻어진다. 그 방식은 상호모순된 이중성에서 일어난다. 즉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를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보존하는 데 있다. 그래서 이중적이다. 주체의 위대한 힘은 "오직 자기의 부정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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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책 제목

홍성수

말이 칼이될 때

김태용

5일 만에 끝내는 클래식 음악사

진중권

미학오디세이2

피터 프랭코판

실크로드 세계사

김승섭

아픔이 길이되려면

여러명ㅋㅋㅋㅋ

신약

앨런 브링클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1

최성민

나의 멘토 소크라테스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이후

알베르 카뮈

이방인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Duncan McCargo

현대 일본의 이해

김용규/김선우, 김연우

철학카페에서 작가읽기1

김용규/윤성희, 심보선

철학카페에서 작가읽기2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 종교를 넘어

문광훈

심미주의 선언

아누 파르타넨

우리는 미래에 좀 더 일찍 도착해 있습니다?

진중권

미학오디세이1

로버츠

세계사I

김서형

그림으로 읽는 빅히스토리

이진

기타부기셔플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배철현

수련

모종린

골목길자본론

김상근

카라바조

러셀 커크

보수의 정신 -ing

로버츠

세계사II 

최인철

프레임

조금주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

배철현 외

낮은 인문학

미리암 마즈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모종린

골목길 자본론

동갑내기

뉴욕과지성

찰스스펜스

왜맛있을까

고재형

문과생존원정대

프란치스카무리

혼자가 좋다

스콧갤러웨이

플랫폼제국의미래

김용규

신 -ing

한동일

라틴어수업

최형욱

버닝맨, 혁신을 실험하다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문광훈

한국인문학과 김우창

프랭크 터너

예일대 지성사 강의

폴 록하트

수포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카비타 데브간

미라클 핏

크리스틴 페레플뢰리

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 가 -ing

오수영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로랑 비네

언어이 7번째 기능

미셸 푸코, 오트르망, 심세광, 전혜리 

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수양

김시덕

서울선언

리치 디보스

더불어 사는 자본주의

제럴드 싯처

하나님의 뜻

문광훈

비극과 심미적 형성

배철현

인간의 위대한 질문

배철현

신의 위대한 질문


1. 소설가 최인호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작가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바빠 미처 감각하지 못하고 지나갔거나, 감각했더라도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예민하게 포착해 그것을 글로 섬세하고 구조적으로 조직해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쓰게한 소재가 무엇인지, 혹은 그 글이 표상하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역으로 생생하게 추적할 수 있게하면서도,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상황을 참신한 단어의 조합으로 묘사하여 익숙한 일상의 순간을 새로운 호흡으로 바라보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오수영 작가의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를 읽으면서, 오랫만에 이 기분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2. 벌써 5년 반정도가 지났네요. 신촌의 한 영어 학원에서 잠시 만났던 작가님의 수줍은 듯 겸손한 웃음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분 역시 저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소식을 접하고 구매한 작가님의 전작, <진부한 에세이>를 읽으면서 저는 그렇게 잠시 닿았던 인연, 아주 잠시 만났던 분의 이미지가 이토록 오래도록 남아있던 이유를 알수 있었어요.

고전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끊임없이 표현하고 다듬어온 저자의 글을 읽으며, 저는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라는 일말의 안도감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잠시 만났지만 조금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기억에 남았던 건 아닐까-하는 저만의 생각도 들었고요.


3. <진부한 에세이>를 읽으며 제가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나' '내면의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바라보던 기울어진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기울어짐을 깨달은 자로서 무언가를 실천하지 않고 있는 현재의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을, 참신하면서도 묵묵하게 표현해서 한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되살아났었습니다. 그렇게, 전혀 진부하지 않았던 에세이를 읽은 지 1년 후, 반갑게도 작가님의 새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책을 읽으며 느꼈던 다른 결의 신기함을 다시 또 느꼈습니다.제가 최근에 계속해서 생각하던 #반성 과 #성찰이라는 키워드가 계속해서 반복해 책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4. 책을 읽으면서, 저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알기 전에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태도를 갖출것을 이야기하며 자기 형성의 윤리를 강조했던 푸코가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사실, 읽는 내내 매 글마다 여러 철학자들이 거진 수천년동안 말해온 이야기들이 하나씩 매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광훈 선생님께서 <한국인문학과 김우창>에서 에세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읽고, 바로 이 책과 작가님이 떠올랐는데,


'어떻게 타인과 만나는 가운데 자기 삶을 꾸려갈 것인가. 글은 수치와 모욕이 없는 삶을 구성하는데, 옳고 #선한 삶에 대한 감각을 키

우는 데 정녕 쓸모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예술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전인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여러 자질 - #감수성 과 #사고력#표현력 이외에도 #해석력 과 #관점#유연함과 #탄력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위 문장을 읽으면서는 작가님이 이러한 능력을 종합적으로 겸비했다는 생각을 했고,


'철학적 논증은 엄밀하면서도 얼마나 따분한 것인가? 감상적 수기를 즉각적으로 호소할 수 있지만, 사안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다루는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깊이 있으면서도 #선명 하고, 명쾌한 논리를 지니면서도 #여운 을 허용하는 어떤 의미의 메아리를 갈구한다. 이 점에서 나는 '#에세이'라는 장르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에세이는 자유롭게 쓰여진 형식을 지니면서도, 그 내용은, 필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깊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감성과 이성을 심미적으로 매개하는 방식이고... 예술 에세이는 감성이 이성화하는 경로를 경험구체적이면서 철학적 명상 아래 기록하는 장르다.'


라는 문장을 보며 이 책이야 말로 여기서 가리키는 에세이의 의의를 포함한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 결국 글쓰기는 주체의 자기반성적 활동일텐데, 이 책은 작가의 자기 반성적 활동을 글로 명쾌하게 표현하면서 읽는 이까지도 그 반성에 동참하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자는 언어, 즉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수년간 고전과 습작으로 새벽을 채운 작가의 부단한 노력과 글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고 느꼈습니다.

자연스럽게, 강유원 선생님께서 한국어로 공부하며 한국어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어정쩡하게 한국말에 외국 단어를 섞어 사용하는 것은 양쪽 모두 언어에 대한 정합성을 기르지 못하고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던 선생님의 그 말씀은,

이따금 영어단어가 더 뜻을 잘 전달할거라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appreciate와 같은 단어를 한국어에 섞어 가며 말하던 저의 일종의 오만함 혹은 게으름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나태함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은 표현을 찾아 단어 하나하나를 곱게 선택한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읽힙니다.


5. 책을 덮고 나서, 책의 뒷 표지에 적힌 글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책이야 말로 이 시대의 언어로 쓰여진 철학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철학은 인지과학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사유과정과 감각에 대한 논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지위를 상실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철학이 여전히 철학인 이유는, 앞선 철학자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지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세우고, 또 그것을 촘촘하고 깊이있게, 논리적으로 탐구했는지 배울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도달한 답을 바탕으로 우리 삶의 화두를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나가는 방법을 우리가 우리에게 적용해보는 것이죠. 거인의 어깨에 올라가 자신의 세상을 꾸리는 것인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지식에 매몰되어서도, 집단 안에서 개인을 잃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자는 책 전반에서 언급합니다. 자신을 약간 예외적인 경우인 듯 겸손하게 말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지나친 집단주의에 경도된 우리사회에 지쳐있고, 취향이 존중받는 개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6. 글이 길었습니다. 마무리 하자면,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탐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작가는 생업에 종사하는 시간과 심미적 사유로 충만한 시간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는 철학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당면하는 문제들에 각자의 방식으로 대면하는 과정이라는 것를 성찰과 반성이라는 키워드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이는 데 있어서 따듯한 마음과, 언어와 사유의 품격을 겸비한 이 시대의 철학자의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찰과 반성이라는 키워드 말고도 발견할 수 있는 보석같은 주제의 글들이 많습니다. 이 긴 글을 읽으시는 것보다 더 쉽게 읽으실 수 있고,또 무겁지도 않은 책이니 한 번씩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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