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당연한 것 같은데.... 이런 걸 유명한 코수스 같은 사람이 말했다면서 배우면 태영씨가 말한 것 처럼 한 사람에게 너무 절대적 위상을 부여하는 이쪽의 특성에 대해 ... 정통사학?은 내러티브와 팩트로 승부하는데, 미술사 미학은 추상적인 걸 다루니까 (추상적이라고 해서 고급단계의 논의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없는 비평준-다원화된 담론의 장은 아니다. 분명히 미적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18세기 센티멘탈 논의의 반복같지만...나는 다원화되는 현대미술에서 여전히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은 그 잣대, 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진정한 작품이고 의미와 울림을 주며 그것이 오래갈 수 있는 고전이 될수 있는가 하는-) 벤야민과 바르트 이야기만 봐도 그걸 왜 어려운 말로 바꿔서 길게 설명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핵심은 하나인데. 나는 이걸 할 뇌구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이런 때다.

> 일반 대중들과의 소통 간으성은 적어도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작품의 필요조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셉 코수ㅡ는 공공미술 작품에 대한 비전문관객들의 접근 가능성에 대해 심지어 다중이 공유하는 장소에서 작업하는 데에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 존재하며, 작가는 일정 수준의 획득 가능한 의미를 제공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고까지 주장....

"컨텍스트에 적합한 공공미술"

Joseph Kosuth, Public text, in Florian Matzner, ed. Public Art, 2001. p.304.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분명히 주장할 수 있다. 즉 한정된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 공공미술 작품의 예술적 의도가 전달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미술사 내부의 문제의식에서만 비롯되는 것- 소위 당대 미술의 자기 지시적 self refrential 성격이어서는 안된다. 더욱이 비평은 실종되고 대중들은 이해를 포기해버린 미술이 처한 동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대중들을 대화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공공미술은 작품수용의 컨텍스트에 밀착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설득력을 지닌다. 상품 시장에서 통용되는 사용자 중신 user-oriented 의 사고가 공공미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흔히 뷔렌의 기둥들이라고 칭하는 다니엘 뷔렌의 팔레 루와얄의 조형 설치물 <두개의 무대> 1985-86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적절한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보인다. 


3. 수용자가 주인이 된 미술


영감받은 천재, 예외적 개인과 같은 낭만주의 미학의 모델에 의거한 작가의 이미지는 공공미술적 실천에서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 보인다. 

 물론 수용자가 중심으로 부각되는 현상은 영구 설치보다는 일시적인 프로젝트로 그리고 오브제보다는 담론과 과정으로 무게중심이 옮겨 온 공공미술의 관해이 정착되는 과정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역사적 압아가르드의 빛바랜 윤리적 이념에 그치고 말았던 예술과 삶의 통합의 당위성이 네오 아방가르드에 있어 예술 창작의 민주화란 기치 아래 부활된 것 마냥 모두가 예술가라는 일종의 문화 포퓰리즘과 같은 이념은 여기서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지역 공동체 기반의 미술 프로젝트나 관람객 참여형 프로그램의 경우 구상만이 작가의 몫. 실현은 수용자에게 전적 의존


최근 프로듀서로서의 매개자역할은 작가의 단순한 협업자 이상으로 집단 창작 또는 공동 창작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새로운 형식의 공공미술 실천과 더불어 야기된 작가의 위상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이제 작가는 절대적 창작자의 자리를 내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도 비로소 수용자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작가가 수용자의 위치에 서지 않고는 공공 미술의 실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 방학때 수용미학 같이 공부한거. 발터 벤야민..논의 다시 미학대계에서 복기할 필요 있음 ㄱㄱㄱ

>>> 디지털 아트 읽다가 나옴.


발터 벤야민이 1936년에 지적한 바대로, 기계적 복제 예술은 종래의 순수 예술의 아우라를 제거하고 예술을 종교로부터 해방시켰다. 다시 말해 전통적 회화는 그 유일무이성으로 인해 종교적 가치에 필적하는 예술의 고유한 가치, 즉 아우라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복제기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사진 및 기타 미디어 아트는 쉽게 복제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아우라를 상실하였다. 벤야민은 아우라의 상실을 예술사에서의 진보로 판단한다*** 즉 예술은 오랫동안 종교에 기생하던 방식을 버리고 현대 대중사회에 걸맞는 민주주의적 존재 방식을 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체의 디지털 아트는 예술의 일회성, 유일무이성을 부인하는 복제예술의 한 형시깅다. 그러나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예술작품들은 실제하지 않는 존재를 재현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복제 예술과는 다른 관점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독자가 곧 저자라 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을 때 그는 텍스트들 간의 상호텍스트성을 염두해두고 있었다. 즉 각각의 독자와 가긱 다른 읽기를 새로운 쓰기로 간주하면서, 바르트는 독자와 저자의 구분을 붕괴시킨다. 실제로 창조자의 역할을 관람자에게 부여하는 상호작용적 디지털 아트는 그의 저자의 죽음 개념을 문자 그대로 구현했다 할 수 있다.

 - 우리도 생각자유롭게 말하고 인정할 권리만 있다면 충분히 이정도는 생각해낼 수 있을듯. 대단한 아이디어다,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다하며 신격화시켜서 저작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을 못하고 저 말을 새로운 말로 바꿔 논문써대는걸 보면 정말 상대적으로 의미가 없으니 가난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과거에 대한 해석, 사료들을 모아 안개를 조금이나마 걷어내는 진정한 사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의미있는 연구. 의미있는 것. 상대적이지만 절대적인 것에 가까울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교수님이 샤프츠베리하면 연상주의라고하셔서...들어본 적이 없는데 읭....하고 찾아보니...

일단 연상주의는...

[ 연상 ] (〔連想, 영 association〕)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관념과 관념의 연결을 뜻하며 이를 관념 연합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때에는 '자유연상'이라 하고 일정한 의도로 이루어질 때에는 '제한연상'이라고 부른다. 관념들 사이에 유사, 대조, 접속에 의거하여 이러한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도 지적한 바 있다. 근세에 이르러 로크와 같은 철학자도 이와 같은 현상을 중요시하였으며, 이어서 흄, 히틀러, J. 밀들은 의식을 우선 단순한 요소로서의 관념으로 분해한 후에 이러한 요소들의 여러 가지 연결 방식에 의해서 복잡한 정신 활동의 발생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 경우를 '연상주의(associationism)', '연상(연합) 심리학(association psychology)이라 한다.


이구...


The association of ideas and critical theory in eighteenth-century England ... (공)저: Martin Kallich에서 보니깐

로크는 그래도 샤프츠베리는 안그랬다 그러네. 어떤 책에서 샤프츠베리도 그랬다고 잘못 기술하구 있다고-



   

자본주의에 저항한다는 것은 결국 마르크스의 영역에서 바탕을 두고 반격을 취하지 않을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아도르노가 등장할 여지가 생긴다. 현재까지 아도르노의 저술은 마르크스주의 예술사의 논의에서 중심이 되어왔으며, 추상예술을 옹호하는 아도르노의 입장에서 현대 예술 담론에 부가된 논의를 찾아볼 있다.

  아도르노는 재현적이거나 모방적 예술의 함정을 피할 아니라, 예술이 실재의  모방이 아니라 실재의 근본적 타자 radical other임을 강조하기 위해 추상예술을 옹호한다.

 

 예술이 자율적이고 대량생산된 문화(키치) 잠입에 저항해야한다는 아도르노이ㅡ 주장은 모더니스트 회화에 관한 클레멘트 그린버그 이론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린버그가 제기한 개별적인 예술매체의 순수성 혹은 능력의 영역 area of competence 개념은 아도르노 주장을 반영한다.

그러나 미적 형태 안에서 진리내용 지시하는 저항의 site으로서의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아도르노의 개념에는 공권력과 경제력의 남용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보다 첨예한 윤리적 분노가 담겨있다.

사회 대립하고 있을 조차도 사회의 부분으로 남아있는 예술은 사회에 대하여 눈을 감고 귀를 막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비합리성irrationality 그늘을 벗어날 없다. 그러나 예술 자체가 비이성 unreason 존재이유로 삼아 비이성에 호소하는 , 예술은 이러한 비이성이라는 저주를 신의 섭리로 바아들이는 신정론 theodicy으로 전환시킨다. .. 예술작품의 내용은 결코 작품들에 주입된 지성의 총합이 아니다. 오히려 아마 반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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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운동은 반자본주의 운동임을 표방하였지만, 자본주의적 현실관계를 뒤바꿀수는 없었다. 대신 의식과 사유의 영역에서는 자본주의를 부정할 있었다. 이처럼 부정하는 사유를 통해 열려진 의식의 공간에서 그들은 다양한 실험을 있었고, 과정에서 현실의 관계와 의식의 지향이 불일치함을 선명하게 확인하였다. 여기에서 예술은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에 대한 조급증을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킬 것이다

아도르노의 글은 모더니즘 논의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아도르노가 마르크스의 글에 관심을 갖도록 독려했던 발터 벤야민과의 친분은 아도르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편지

아도르노, 칸트, 전적으로 감각에 의존하는 쾌감은 예술이 가꾸어야 쾌가 아니라는 감관판단을 하엿듯이, 정신과 감각이 동시에 활동해~~내면에서 일어나는 쾌감. 관점에 따라 아도르노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재즈에 대해 그토록 엄격한 입장을 고수할 있었다. P.522 미학대계1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지만, 욕망의 민주화를 어디까지 용인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자신의 욕구를 끊임없이 상대화하면서 사는 일이 불가능한만큼, 나에게 거슬리는 타인의 욕구를 어디까지 수용할 잇는가, 경계 설정의 문제도 간단하지는 않다. 이보다 문제는 모든 것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조절해야 한다는 사실. 욕구에 대해서도 철학적 성찰이 요청되는 시대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은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이론 구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있다.


1. 청년 그람시의 문화 개념 <사회주의와 문화>


- 실증주의적 문화 개념 비판, 백과사전적 지식의 축적이라 생각하는 전통적 관점을 깨뜨려야. 어떤 양의 사실과 자료들 기억해왔기에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을 우월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라들에 대해 문화적 장벽을 쌓는 것을 도울 뿐.

- 어떠한 사회집단의 정치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집단의식 형성 없이는 불가능하고, 이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준비가 필수적

- 프로레타리아 혁명은 총체적일 수 밖에 없음. 사회주의는 삶에 대한 총체적 전망. 자신만의 신념, 철학, 도덕을 지니는 새로운 정신적 습관을 창출해내는 사회의 총체적 변혁이며, 이는 새로운 집단의지를 창조해 냄으로써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다.

-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획득하는 문제와 더불어 정신적 권력을 획득하는 문제 또한 반드시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로렐타리아는 스스로를 정치경제적으로 조직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 조직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2. 국민적-대중적(nazionale-popolare) 문화개념


- Q: 왜 이탈리아에서는 국민적-대중적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가? 왜 이태리 문학은 대부분 자국내에서 광범위한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하며, 왜 신문들은 외국의 소설, 주로 프랑스 소설들을 연재소설로 싣고 있는가?

- A: 이탈리아에서는 작가와 대중, 지식인과 광범위한 국민-대중 사이의 유기적 통일이 전혀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것. >>> 언어의 문제와도 관련됨. 이탈리아에서는 국민적이라는 말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제한된 의미 가지고 있어서 어떤 겨웅에든 대중적이라는 말과 일치 하지 않음 강조. 이탈리아에서 지식인들은 대중, 즉 국민으로부터 소원하며 그들은 특권적 전통과 결부됨. "대중들의 기본적인 열정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않고,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것들을 설명, 정당화하지 않고 최고의 세계관과 역사법칙, 즉 지식에 변증법적으로 연관시키지 않고서도 지식일수도 있다고 믿는" 오류를 범함. 


모든 차원에 대중국민이 문학에 관심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토착적인 지적 요소를 외국인보다 더 이질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 해외작가의 작품 선호한다는 사실, 대중국민이 해외지식인들에 보다 밀접한 연관된 것으로 느낀다는 것. 어떠한 국민적인 지적 도덕적 블록도 존재하지 않음 의미.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대중과 지식인의 유기적 통일 통한 국민, 대중적 문화의 형성 및 대중의 지적 도덕적 개혁을 통한 해게모니 획득 강조. 이를 위한 운동의 출발점은 대중들의 일상적 상식과 대중문화로부터 출발해야 함 강조. 


3. 문학에 대한 그람시의 견해


- 방법론적으로 크로체에 의해 외곡되어 계승된 데 상티스의 해석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 데 상티스의 사상 그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핵심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문화는 일관되고 통일적이며 국민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인생관과 인간관, 세속적인 종교, 문화가 된 철학-윤리-생활방식, 시민적 개인적 행동규범을 산출하는 철학을 의미하는 것. 무엇보다도 민중에 대한 새로운 태도 요청. 크로체의 개인주의적이고 반역사적인 미학적 입장과는 분리될 수 밖에 없음. 데 상티스에게 문학의 본질은 직접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체로 인식된 형식.  이탈리아 문화속에서 그 자신의 비평활동에 부여했던 국민적, 대중적 경향인 바. 데 상티스를 통해 국민적 대중적 문학비평의 방법론적 기준을 찾아냈다. 


이렇듯 데 상티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그람시는 크로체의 사상에 대한 검토와 비판을 수행했다. 크로체의 초기 미학이 예술가 내부로부터의 직관과 같은 정신적 활동에 주요 관심이 놓여졋던 반면, 그람시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예술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기능에 주목하는 것이다.


또한 크로체의 이론이 예술적 창조행위의 정신적 측면에 집중한다면, 그람시는 구체적인 현실세계 속에 존재하는 예술의 역사사회적 함의와 기능에 초점. 


크로체는 예술의 역사와 문화이 역사 엄밀히 구분, 예술사는 개별 작품의 역사이고 이는 유일하게 적절한 미학사의 종류라고 한 반면에 문화는 경향, 장르, 예술가들의 삶, 지적인 배경, 예술에 대한 관념 등의 역사라고 설명. 크로체의 관점에 다르면 이러한 문화사는 개별 예술자궆ㅁ과 그것의 아름다움 설명하는 데 있어 아무런 실재도 지니지 않는 것.


그람시는 이를 비판. 예술적 영역과 역사적 영역 사이 대화의 모든 가능성 닫아버리고 필연적으로 반역사적인 미학적 입장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 


다른 한편 그람시는 속류 유물론주의적인 문학과넹도 단호하게 투쟁. 만초니 베르가 셰익스피어: 민중적 인물에 대한 작가의 태도. 만초니와 셰익스피어 부르주아나 평범한사람들 무대 위에 올리지만 조롱혐오재현되며 웃음거리 됨. 


작품에 대한 도덕적 비평과 미학적 비평 구분해야 함. 즉 사상가로서 작가와 예술가로서 작가 구분해야할 필요성 강조. 즉, 미학적 예술적영역 // 정치비판, 사회적 삶에 대한 비판 문제 구분.


문학에 대한 문화사적 연구와 예술비평적 연구 차별성에 입각해 예술비평의 문제를 문화사적 연구로 환원시켜버린단 점에서 속류 실증주의적 유물론 문제점 인식.


그람시의 역사주의적 이해: 문학/사회, 예술/역사, 이론/실천이라는 전통적 이분법 구분 극복하는 방향으로 방향 열음. 


c.f. 이태리아 낭만주의는 존재했엇나?, 그람시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지식인과 대중 그리고 민족 가의 특수간 관계 또는 결합 의미. 넓은 의미에서 민주주이ㅡ의 반영. 낭만주의는 이태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이름을 얻은~ 에 동반, 선행, 승인 발전시킨게 낭만주의... 


4. 그람시의 대중문학 분석


- 그는 대중적인 상업문학을 정확히 문화사의 관점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감정과 세계관에 있어 침묵하는 다수 속에서 대중이 지배하는 시대의 철학의 지표로 파악. 새로운 문학이 미래주의 운동처럼 인텔리 출신의 예쑬 조류에서 나올 수 있단 생각을 잘못된 편견이라고 신랄하게 비판. 

: 대중소설들에 대한 경험적 분석으로 나아가 대중문학의 분류와 발생 요인, 지배적 유형, 각각의 대중문학의 하위 장르를 즐기는 수용자에 대해 분석. 그는 대중 문학을 연재/추리/모험/과학/유토피아철학/전기 소설 등으로 나누어 설명... 나아가 대중소설의 지배적 유형에 대해 연구통해 대중들의 근본 취미 변화 확인코자 함.


대중의 수용을 통해서 야기되는 도덕적 감수성의 문제로 초점이 이행. 결국 예술을 통해 표현된 것으로서의 돋거성은 어떤 영원한 원칙들의 체제가 아니라 작품과 대중과의 접초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역동적이고 역사적인 과정. 


그람시는 대중문학의 성공과 인기란 그것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민중적인 내용에서 비롯된다는 점 강조. 비록 민중들은 몽매한 상태에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작품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는 까닭은 그 이면에 사람들에게 진정한 민중적 즐거움을 안겨다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수용과정을 통해 대중들이 그러한 민중적 이념과 희망을 추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속물근성도 있지만 민주적인 엶망의 토대도 충붆 찾아볼 수 있기 때문.


더 나아가 그람시는 테일러주의와 기계화에 의해 유린당한 인간의 삶에 있어 합리화라는 미명하에 중산계급과 지식인에게까지 위협이 밀어닥치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모험의 몰락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주는 너무나 큰 모험성 즉 삶에 있어 너무나 큰 불확실성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름답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갈망하는 까닭은 현실생활로부터 일탈이라는 모험이 제기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주어지는 야만적이고 거부감느껴지는 모험과는 반대로 자유로운 주도권을 지니는 모험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론의 이론가들과 달리 대중문화의 유행과 성공의 원인을 냉정하게 짚어봄으로써 그것의 긍정적의미또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한 모험이 주는 긍정적 지점은 자신의 삶보다 한층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삶에 접촉함으로써 자신을 교육시키길 원하고 이상적인 모델을 머리 속에 그려봄으로써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키려는 바람. 더 나아가 어떠한 생활조건 속에서 가능한 것보다 더 많이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는 바람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람시는 대중문학이 주는 즐거움이 단지 허위적이거나 도피적이게 만드는 마취제나 아편같은 부정적인 측면 뿐만아니라, 대중들의 현실적인 욕망을 채워주고 이상적인 모델을 그려줌으로써 그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역할 또한 강조한다. ...새로운 주체의 형성, 종속집단이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으로 발전하는데 있어 이러한 대중문학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인 힘, 이른바 저항적 즐거움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p. 242

 

 I can also talk a bit about my own projects in Southeast Asia. I began working in Myanmar in 1997 and have continued to produce work there consistently. At present, I'm supporting young intellectuals who are developing independent research in educational and post-traumatic activities for young children and novice monks who were affected by the Nargis cyclone disaster in 2008 and the wave of state terror unleashed after the saffron uprising[protests led by monks] in 2007.


 I'm waiting for the next round of funding to start a technology-based project that can be used to conduct educational activities and promote skills in information technology, with the intention of spreading knowledge that can be used to circumvent state control of communication systems in Myanmar. These activities are carried out under the concept of the Open Academy, which began in 2003 as an activity if NICA. It's a culture and art program with processes devoted to open learning and resource development. 

미학대계 2: 1920년대 정치적 상황 및 이론사적 상황과 철학의 문제: 잃어버린 혁명


 p.722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직후의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희망찬 확신과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피살로 마감되는 독일에서의 스파르타쿠스 사건을 마지막으로, 1920년대 들어 서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지연, 불발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실종될 조짐까지 보이게 된다. 서유럽 선진 국가들 가운데서의 자본주의 사회가 노정할 수 있는 모든, 정체/경제적 위기 상황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

이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여성혁명가

[Rosa Luxemburg]

출생 - 사망1871.3.5. ~ 1919.1.15.

1919년 1월 15일 베를린. 150cm가 넘을까 말까 한 신장에 다리가 불편한 한 40대 여인이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휘두른 총의 개머리판에 두개골이 으스러지도록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그대로 다리 위에서 운하로 버려졌다. 독일의 11월 혁명 정국 속에서 우파 의용단에게 살해당한 이 왜소한 중년 여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그녀는 20세기 초, 러시아와 독일의 혁명을 주도하며 새로운 자유와 평등 사회를 꿈꾸던 정열의 혁명가이자 마르크스 이래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일컬어지던 탁월한 이론가였다.

타협을 모르는 불굴의 이상주의자

 이미지 1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그녀가 몸담았던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획득했던 시기였다. 그녀를 살해한 군인들도 11월 혁명을 이끌어 제정을 무너뜨린 세력이었다. 얼핏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세력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서둘러 체포하고 재판도 없이 무참히 살해한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인물이 가진 타협을 모르는 순수 사회주의 사상과 그녀의 폭발적 행동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집스러울 만큼 자신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혁명을 제대로 된 방법으로 100%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상적 혁명 달성은 공감하지만 과정의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라던가, 혹은 시대가 변했으니 그에 맞게 이론을 새롭게 수정해야 된다는 주장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에 맞서 순정한 혁명정신을 부르짖었다.

그녀는 순수한 국제주의자였으며 평등주의자였고 민주주의자였다. 그러기에 그녀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계급해방의 노선을 택했고, 혁명달성을 위해 직업적 혁명가의 독재를 정당화하던 레닌과 맞섰으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사회주의 이론을 수정,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것을 주장한 베른슈타인과 이론 투쟁을 벌였다. 그녀는 노동자 스스로가 만든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세계를 꿈꾸었으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대다수 그녀의 동료들은 상황과 자기논리에 맞추어 변해갔고 결국,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그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결국 그녀가 독일 사회민주당과 결별해 독자적인 급진적 혁명당 스파르타쿠스단을 만들고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민주당과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위태로웠던 공존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한 세력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적들과 동료들이 두려워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꿈꾼 세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녀가 옥중에 있으면서 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써놓았다.

인간다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것은 확고하고 명쾌하며 명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랑하다는 것을요. 흐느끼는 것은 약하다는 표시예요.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화창한 날을 맞을 때마다, 아름다운 구름을 볼 때마다 그것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러시아 식민지 폴란드에서 태어난 다리를 저는 유태인 여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세계사를 뒤바꿀 거친 혁명의 세계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출신과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던 나라 폴란드(당시는 러시아의 식민지였다)에 사는, 유럽인들로부터 천대받던 유태인(그렇지만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다. 이것 또한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이론가의 출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이었고 여성의 인권이 가정에서부터 존중받지 못하던 19세기와 20세기 초를 살아가는 여성이었다. 거기다 어렸을 때 앓은 병으로 다리가 불편하였고 그 탓에 신장도 그다지 크지 않은 왜소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자신의 불리한 입장과 연약함을 무기 삼아 가정에 눌러앉아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로자 룩셈부르크였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핸디캡을 극복하고 이를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폴란드의 유태인이란 그녀의 출신은 일찍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민족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국제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게 했고 불편하고 왜소한 몸과 여성이라는 입장은 그녀를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계층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하여 당시의 혁명가나 이론가들이 쉽게 유혹받던 왜곡된 권력욕으로부터 그녀를 해방시켰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청소년 시절 명석하고 뛰어난 두뇌로 이미 6개 국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던 우수한 학생이었던 한편, 식민지 폴란드를 탄압하는 제정 러시아에 항거하는 반정부운동에도 일찌감치 가담하고 있었다. 고교 졸업 무렵 수배대상이 된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을 하게 되고 그곳 대학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땄다. 또한, 그녀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레오 요기헤스를 만났고 본격적인 사회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98년 구스타프 뤼베크란 독일인과 위장 결혼하여 독일시민권을 취득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2차 인터내셔널에 참여하게 되고 사회주의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러시아의 1차 혁명에 고무받아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로 돌아가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면서 폴란드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 반목하였다. 국제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족주의를 매우 경계하였는데 그녀는 민족주의나 민족의 독립이란 미명이 계급의식을 흐려 결국 계급해방을 방해하고 국가간, 혹은 민족간 이기주의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매우 정확하게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폴란드의 독립보다는 계급 해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에 대해 일부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그녀가 폴란드의 독립을 방해하기 위해 러시아 짜르가 보낸 첩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이 폴란드에서의 활동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베른슈타인과 레닌에 맞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수정주의 논쟁을 펼친 베른슈타인. 
<출처 : St.Holz at en.wikipedia.org>

이에 앞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의 사회민주당 내에서 당내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던 베른슈타인과 이론 논쟁을 펼쳐 그의 수정주의 노선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엥겔스의 친구로 마르크스 사후 독일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베른슈타인을 상대로 20대 후반의 로자는 끈질긴 이론논쟁을 거듭하며 그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란, 자본주의의 자기발전과정을 인정하고 그에 맞추어 마르크스주의를 수정 적용하자는 이론이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자체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정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곧이어 붕괴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신용제도, 카르텔, 트러스트, 완벽한 통신기술 등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적응수단 때문에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노동자들의 무장봉기나 급진적 혁명 같은 물리적인 방법보다는, 개선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조합이나 의회 진출 등을 통해 비판세력으로서 사회주의를 적용하고 점진적 전진을 통한 권력 획득을 주장하였다. 이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라는 논문에서 혁명의 필요성을 사회주의의 정설로 항변하고, 베른슈타인이 말한 의회 진출을 통한 점진적인 사회주의 권력 장악은 공상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이 말한 자본주의의 적응수단이야말로 신속한 자본주의 발달과 이에 따른 자기모순에 의한 붕괴를 초래할 요인이며, 식민지 등 자본주의가 착취할 영역이 더 이상 없어지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붕괴는 필연이라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을 더욱 첨예화하여 혁명을 통한 권력 획득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장이었다. 노동조합이나 의회 진출 등 수정주의의 방법론은 노동자를 노동의 영역에 제한함으로써 그 정치적 힘을 박탈하여 자본주의를 돕고 혁명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비판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당 조직론에 대해 논쟁한 레닌. 
<출처 : SF007 at en.wikipedia.org>

그녀는 사회주의로의 길은 오직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 즉 혁명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눈앞에 현실보다는 이상에 바탕을 둔 확고하고도 순정한 그녀의 주장은 제2인터내셔널에서 받아들여졌고 수정주의는 사회민주당의 공식적 노선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변화하는 시대상 속에서 수정주의는 실제적인 노동 현장에서 계속 그 명맥을 이어갔고 급진적이고 물리적인 혁명에 회의하던 상당수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로자 룩셈부르크의 결벽증에 가까운 노동자 중심의 혁명이론은 레닌 비판에서도 나타난다. 레닌이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직업적 혁명가에 의한 혁명 주도와 정당조직의 규율화를 강조한 데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많은 우려를 표명했다. 그녀는 모든 혁명은 엘리트혁명이 아닌 대중운동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대중에 의한 파업과 운동은 객관적인 사회상황에 대한 반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화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혁명이 이루어지리라고 본 것이다.

그녀는 레닌의 혁명이론이 볼셰비키의 독재와 관료화로 흐를 것을 경계하였고 실제로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 이루어내는 혁명의 가치를 가장 고귀하고 숭고하게 생각한 혁명가였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범하는 오류는 가장 우수한 중앙위원회의 완벽성보다도 역사적으로 훨씬 더 풍요롭고 귀중한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해방이 아니면 안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스파르쿠스단의 결성과 최후

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연설에서 당시 독일의 황제이던 빌헬름2세를 비판하였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1년간의 옥살이 후 출소한 그녀는 새로운 정치적 전개를 목도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전부터 늘 경계하던 민족주의와 수정주의가 한꺼번에 독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팽배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세계전쟁이었다. 국가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당장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와 민족의 안위에 대범할 수 없었던 독일의 사회민주당원들은 계급문제를 뒤로한 채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사회민주당은 전쟁을 지지하는 독일사회민주당과 그렇지 않은 독립사회민주당으로 분열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적기>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훼절된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논설을 써서 그들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급진적인 혁명파들의 중심에 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과거 로마시대 노예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딴 스파르타쿠스단(독일 공산당의 전신)을 결성하고 급진적 혁명을 위한 활동을 해나갔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11월 혁명이 일어난다. 이 혁명은 패전책임론과 사회주의자들의 반발, 전쟁으로 인한 민중들의 궁핍 속에서 킬 지방의 수병들의 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제정은 무너졌고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혼란스러운 혁명정국에서 정권을 잡은 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우파들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장례식중 장례 행렬 모습. <출처 : German Federal Archives>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순정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불완전한) 혁명정국으로부터 단숨에 노동자 중심의 온전한 혁명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19년 1월 1일 스파르타쿠스단을 독일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사회민주당을 돕는 우익 군인들의 손에 진압되었다. 많은 급진적 혁명가들이 체포되는 과정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베를린 경찰 최고직을 장악하고 있었던 보수적 의용단(Freikorps)에 잡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체포된 후 심한 욕설을 들으며 개처럼 끌려 다니다가 머리를 강타 당하고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시신은 운하 속에서 잠겨 있다가 그해 5월에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은 나치의 집권기에 한 차례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90여 년간 꾸준히 그녀의 이상을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2009년 베를린의 한 병원 지하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으로 보이는 시신 한 구가 발견됨으로써 현재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 그녀 본인의 것이냐는 논쟁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사상이 한물 간 유행가처럼 들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품고 죽은 탁월한 혁명가로 기억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로자 룩셈부르크가 최후로 쓴 글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 - 이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여성혁명가 (인물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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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교수님 서건사 3,4,5

박이문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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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에멀린

 20세기 현대예술이론

 윤

추상미술과 유토피아 

 

 

누스바움

감정의 격동 1. 인정과 욕망

 

감정의 격동 2. 연민

 

감정의 격동 3. 사람의 등정

Nora. A. Taylor

Modern and Contemporary art of Southeast Asia


DH쌤께서 첫 만남에 주신 책...정말 놀랍고 감사했다.

하루 뵌 D샘은, 오빠라고 불러도 될것만 같은 만인에 대한 친근감을 선사하시는, 인문학계의 락스타, 인간 비타민! 무엇보다도 연구에 전진하시고 실질적으로 make something out of nothing 하시는 멋진 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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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수양>은 <주체의 해석학>을 번역하셨던 심세광 선생님과 함께, 같은 오트르망* 소속의 전혜리 선생님이 번역하셔서 푸코의 주요 개념(생정치학, 지식의 고고학, 계보학, 담론 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글 자체는 걸림없이 매끄럽게 읽힌다. 

1. 이 책에서 말하는 바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권력에 대한 주체의 비판적 태도, 혹은 더 나아가 권력에의 저항은ㅡ 자기 자신/타인/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며 윤리적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가는 지적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 

2. 푸코는 두 강의에서 '비판'과 '자기 수양'의 등장과 그 역사를 검토하는데, 첫 번째 강의인 <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푸코는 비판적 태도의 역사적 출발점을 15-16세기 서구 근대 사회 가톨릭 교회의 사목 활동 속에서 발전된 권력 형태('사목적 통치성')에서 찾는다.* 이는 개인의 일상적인 품행을 인도하는 권력 형태가 시민 사회 내에서 확대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18) 

이 장에서 “어떻게 이런 식으로, 그들에 의해, 그러한 원칙의 이름으로 통치 받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책 전체를 포괄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통치 자체는 인정하지만, "이런 식으로 까지는" 통치 받지 못하겠다는 푸코의 생각에 정말 공감했다. 자본주의, 인정하지만 '이런 식'으로 흘러가자는 건 아니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랄까...'-' 

3. 두 번째 강의인 <자기 수양>의 목표는 사유의 역사(개인과 진리, 의무, 자신, 타자와 맺는 관계)가 어떻게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강의에서 푸코는 자기 돌봄(epumeleia heautou) 원리의 최초 철학적 구상이 플라톤이 쓴 대화편 <알키비아데스>에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받아온 것과 달리, 자기 배려의 한 부분에 속해왔다고 말한다. 

즉, <자기 수양>은 유교의 수양론을 연상케 하는 주체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푸코의 생각의 집합이다. 인간이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노력한다면 끊임없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주체의 윤리적 구축 개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주체는 스스로 변하고자 노력할 때 이미 윤리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자기배려와 수련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며 그 방법은 단순한 명상이 아니라 일련의 실천이다. 그래서 윤리적 '자기 발전'이 아니라 자신을 윤리적 주체로 '구축'하는 데 초점을 둔 푸코의 강의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흥미로웠던 부분은, 푸코가 우리 사회에서 자기와 맺는 관계가 구축되는 영역은 상당 부분 성적 경험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러므로 자기를 구축하는 문제와 성현상의 역사라는 문제를 분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 부분이다. 꼭 성적 경험이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이라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성적 취향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 돌봄(epumeleia heautou).그리스, 너 자신을 알라는 정언과 실천이 자기 배려와 연관. 그것에 종속되어 있었다.기독교 금욕주의에 이르러 수련적인 자기 변형이 아니라 자기 포기를 강조하면서 오늘날, 자기 배려(돌봄) 개념이 가려졌다는 해석 또한 흥미로웠다. 

5. 수양하는 인간과 정치 사이에 통로를 만드려던 푸코의 노력은 높이 살만 하지만, 인간의 정치 개입을 적극적이게 하면서도 최대한 비권위주의적일 것을 요청했던 부분은 모호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분은 실존의 미학이라는 윤리적인 질문을 서구회화와 연결시켰던 푸코의 예술에 대한 관심을 고려하면 또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 부분 나중에 잘 풀어서 다시 정리해야지...) 

6. 마무리는 이 글에서 말한 것들을 종합/요약한 김우창 선생님의 글로 ! 

“사회생활의 필요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보다 깊이 살고자 하는 동기에서 나오는 도덕적 추구가 결국은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자기완성의 추구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될 수 있는 도덕과 윤리이다.” 김우창, <정의와 정의의 조건>,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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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트르망: '다르게 autrement'를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이름은 따온 젊은 연구자들의 모임. 공부와 번역들을 함께 하며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번역 이외에도 알튀세르, 들뢰즈 중심으로 프랑스 현대 비판철학 전반을 연구. 

논외이지만, 수업보다 자신의 연구에 전념하고 싶어하는 몇몇의 교수자들이 굉장히 부러워할 것 같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상체계사 종신교수였던 푸코 ㅋㅋ 그의 강의와 관련한 직무는 자신의 저작에 대하여 매년 12번 정도의 공개 강의를 하는 것뿐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1969년 강의한 <저자란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강연임. 

**서양/동양철학-신 유학이 지향했어야하는 부분-문화정치-중국의 부상과 다시 처짐-덩샤오핑의 마지막말 해서도 한 번 정리해보고 싶은 부분이다. 

***  
푸코 사상의 핵심 개념이 ‘권력’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푸코의 글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마주한 단어인 “관계”가 눈에 밟힌다.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권력의 현상은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권력 관계가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며,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권력은 권력자와 피권력자가 맺고 있는 관계에 불과하다. 

박영욱 선생님의 말을 옮겨보자면, “푸코에게 권력은 담론의 형태로 실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은 담론을 필요로 한다.” 푸코는 권력을 마치 소유할 수 있는 대상물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권력에 대한 입장을 권력의 경제주의라고 표현하였다.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경제주의는 권력이 활동하는 범위를 피상적인 수준으로 제한함으로써 현실의 역학관계를 정확하게 분석해낼 수 없게 만든다. 

푸코와 같은 동성애자가 권력관계에서 피지배자가 되는 것은 권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은 동성애자를 결코 정상적인 성의 범주로 간주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성 담론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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