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쌤께서 첫 만남에 주신 책...정말 놀랍고 감사했다.

하루 뵌 D샘은, 오빠라고 불러도 될것만 같은 만인에 대한 친근감을 선사하시는, 인문학계의 락스타, 인간 비타민! 무엇보다도 연구에 전진하시고 실질적으로 make something out of nothing 하시는 멋진 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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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수양>은 <주체의 해석학>을 번역하셨던 심세광 선생님과 함께, 같은 오트르망* 소속의 전혜리 선생님이 번역하셔서 푸코의 주요 개념(생정치학, 지식의 고고학, 계보학, 담론 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글 자체는 걸림없이 매끄럽게 읽힌다. 

1. 이 책에서 말하는 바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권력에 대한 주체의 비판적 태도, 혹은 더 나아가 권력에의 저항은ㅡ 자기 자신/타인/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며 윤리적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가는 지적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 

2. 푸코는 두 강의에서 '비판'과 '자기 수양'의 등장과 그 역사를 검토하는데, 첫 번째 강의인 <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푸코는 비판적 태도의 역사적 출발점을 15-16세기 서구 근대 사회 가톨릭 교회의 사목 활동 속에서 발전된 권력 형태('사목적 통치성')에서 찾는다.* 이는 개인의 일상적인 품행을 인도하는 권력 형태가 시민 사회 내에서 확대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18) 

이 장에서 “어떻게 이런 식으로, 그들에 의해, 그러한 원칙의 이름으로 통치 받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책 전체를 포괄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통치 자체는 인정하지만, "이런 식으로 까지는" 통치 받지 못하겠다는 푸코의 생각에 정말 공감했다. 자본주의, 인정하지만 '이런 식'으로 흘러가자는 건 아니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랄까...'-' 

3. 두 번째 강의인 <자기 수양>의 목표는 사유의 역사(개인과 진리, 의무, 자신, 타자와 맺는 관계)가 어떻게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강의에서 푸코는 자기 돌봄(epumeleia heautou) 원리의 최초 철학적 구상이 플라톤이 쓴 대화편 <알키비아데스>에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받아온 것과 달리, 자기 배려의 한 부분에 속해왔다고 말한다. 

즉, <자기 수양>은 유교의 수양론을 연상케 하는 주체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푸코의 생각의 집합이다. 인간이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노력한다면 끊임없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주체의 윤리적 구축 개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주체는 스스로 변하고자 노력할 때 이미 윤리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자기배려와 수련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며 그 방법은 단순한 명상이 아니라 일련의 실천이다. 그래서 윤리적 '자기 발전'이 아니라 자신을 윤리적 주체로 '구축'하는 데 초점을 둔 푸코의 강의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흥미로웠던 부분은, 푸코가 우리 사회에서 자기와 맺는 관계가 구축되는 영역은 상당 부분 성적 경험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러므로 자기를 구축하는 문제와 성현상의 역사라는 문제를 분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 부분이다. 꼭 성적 경험이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이라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성적 취향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 돌봄(epumeleia heautou).그리스, 너 자신을 알라는 정언과 실천이 자기 배려와 연관. 그것에 종속되어 있었다.기독교 금욕주의에 이르러 수련적인 자기 변형이 아니라 자기 포기를 강조하면서 오늘날, 자기 배려(돌봄) 개념이 가려졌다는 해석 또한 흥미로웠다. 

5. 수양하는 인간과 정치 사이에 통로를 만드려던 푸코의 노력은 높이 살만 하지만, 인간의 정치 개입을 적극적이게 하면서도 최대한 비권위주의적일 것을 요청했던 부분은 모호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분은 실존의 미학이라는 윤리적인 질문을 서구회화와 연결시켰던 푸코의 예술에 대한 관심을 고려하면 또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 부분 나중에 잘 풀어서 다시 정리해야지...) 

6. 마무리는 이 글에서 말한 것들을 종합/요약한 김우창 선생님의 글로 ! 

“사회생활의 필요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보다 깊이 살고자 하는 동기에서 나오는 도덕적 추구가 결국은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자기완성의 추구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될 수 있는 도덕과 윤리이다.” 김우창, <정의와 정의의 조건>,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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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트르망: '다르게 autrement'를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이름은 따온 젊은 연구자들의 모임. 공부와 번역들을 함께 하며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번역 이외에도 알튀세르, 들뢰즈 중심으로 프랑스 현대 비판철학 전반을 연구. 

논외이지만, 수업보다 자신의 연구에 전념하고 싶어하는 몇몇의 교수자들이 굉장히 부러워할 것 같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상체계사 종신교수였던 푸코 ㅋㅋ 그의 강의와 관련한 직무는 자신의 저작에 대하여 매년 12번 정도의 공개 강의를 하는 것뿐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1969년 강의한 <저자란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강연임. 

**서양/동양철학-신 유학이 지향했어야하는 부분-문화정치-중국의 부상과 다시 처짐-덩샤오핑의 마지막말 해서도 한 번 정리해보고 싶은 부분이다. 

***  
푸코 사상의 핵심 개념이 ‘권력’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푸코의 글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마주한 단어인 “관계”가 눈에 밟힌다.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권력의 현상은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권력 관계가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며,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권력은 권력자와 피권력자가 맺고 있는 관계에 불과하다. 

박영욱 선생님의 말을 옮겨보자면, “푸코에게 권력은 담론의 형태로 실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은 담론을 필요로 한다.” 푸코는 권력을 마치 소유할 수 있는 대상물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권력에 대한 입장을 권력의 경제주의라고 표현하였다.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경제주의는 권력이 활동하는 범위를 피상적인 수준으로 제한함으로써 현실의 역학관계를 정확하게 분석해낼 수 없게 만든다. 

푸코와 같은 동성애자가 권력관계에서 피지배자가 되는 것은 권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은 동성애자를 결코 정상적인 성의 범주로 간주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성 담론과 관련이 있다.

1. 소설가 최인호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작가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바빠 미처 감각하지 못하고 지나갔거나, 감각했더라도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예민하게 포착해 그것을 글로 섬세하고 구조적으로 조직해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쓰게한 소재가 무엇인지, 혹은 그 글이 표상하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역으로 생생하게 추적할 수 있게하면서도,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상황을 참신한 단어의 조합으로 묘사하여 익숙한 일상의 순간을 새로운 호흡으로 바라보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오수영 작가의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를 읽으면서, 오랫만에 이 기분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2. 벌써 5년 반정도가 지났네요. 신촌의 한 영어 학원에서 잠시 만났던 작가님의 수줍은 듯 겸손한 웃음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분 역시 저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소식을 접하고 구매한 작가님의 전작, <진부한 에세이>를 읽으면서 저는 그렇게 잠시 닿았던 인연, 아주 잠시 만났던 분의 이미지가 이토록 오래도록 남아있던 이유를 알수 있었어요.

고전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끊임없이 표현하고 다듬어온 저자의 글을 읽으며, 저는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라는 일말의 안도감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잠시 만났지만 조금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기억에 남았던 건 아닐까-하는 저만의 생각도 들었고요.


3. <진부한 에세이>를 읽으며 제가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나' '내면의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바라보던 기울어진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기울어짐을 깨달은 자로서 무언가를 실천하지 않고 있는 현재의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을, 참신하면서도 묵묵하게 표현해서 한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되살아났었습니다. 그렇게, 전혀 진부하지 않았던 에세이를 읽은 지 1년 후, 반갑게도 작가님의 새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책을 읽으며 느꼈던 다른 결의 신기함을 다시 또 느꼈습니다.제가 최근에 계속해서 생각하던 #반성 과 #성찰이라는 키워드가 계속해서 반복해 책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4. 책을 읽으면서, 저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알기 전에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태도를 갖출것을 이야기하며 자기 형성의 윤리를 강조했던 푸코가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사실, 읽는 내내 매 글마다 여러 철학자들이 거진 수천년동안 말해온 이야기들이 하나씩 매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광훈 선생님께서 <한국인문학과 김우창>에서 에세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읽고, 바로 이 책과 작가님이 떠올랐는데,


'어떻게 타인과 만나는 가운데 자기 삶을 꾸려갈 것인가. 글은 수치와 모욕이 없는 삶을 구성하는데, 옳고 #선한 삶에 대한 감각을 키

우는 데 정녕 쓸모있는 것인가? 이 물음에 예술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전인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여러 자질 - #감수성 과 #사고력#표현력 이외에도 #해석력 과 #관점#유연함과 #탄력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위 문장을 읽으면서는 작가님이 이러한 능력을 종합적으로 겸비했다는 생각을 했고,


'철학적 논증은 엄밀하면서도 얼마나 따분한 것인가? 감상적 수기를 즉각적으로 호소할 수 있지만, 사안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다루는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깊이 있으면서도 #선명 하고, 명쾌한 논리를 지니면서도 #여운 을 허용하는 어떤 의미의 메아리를 갈구한다. 이 점에서 나는 '#에세이'라는 장르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에세이는 자유롭게 쓰여진 형식을 지니면서도, 그 내용은, 필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깊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감성과 이성을 심미적으로 매개하는 방식이고... 예술 에세이는 감성이 이성화하는 경로를 경험구체적이면서 철학적 명상 아래 기록하는 장르다.'


라는 문장을 보며 이 책이야 말로 여기서 가리키는 에세이의 의의를 포함한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4. 결국 글쓰기는 주체의 자기반성적 활동일텐데, 이 책은 작가의 자기 반성적 활동을 글로 명쾌하게 표현하면서 읽는 이까지도 그 반성에 동참하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자는 언어, 즉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수년간 고전과 습작으로 새벽을 채운 작가의 부단한 노력과 글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고 느꼈습니다.

자연스럽게, 강유원 선생님께서 한국어로 공부하며 한국어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어정쩡하게 한국말에 외국 단어를 섞어 사용하는 것은 양쪽 모두 언어에 대한 정합성을 기르지 못하고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던 선생님의 그 말씀은,

이따금 영어단어가 더 뜻을 잘 전달할거라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appreciate와 같은 단어를 한국어에 섞어 가며 말하던 저의 일종의 오만함 혹은 게으름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나태함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은 표현을 찾아 단어 하나하나를 곱게 선택한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읽힙니다.


5. 책을 덮고 나서, 책의 뒷 표지에 적힌 글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책이야 말로 이 시대의 언어로 쓰여진 철학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철학은 인지과학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사유과정과 감각에 대한 논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지위를 상실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철학이 여전히 철학인 이유는, 앞선 철학자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지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세우고, 또 그것을 촘촘하고 깊이있게, 논리적으로 탐구했는지 배울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도달한 답을 바탕으로 우리 삶의 화두를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나가는 방법을 우리가 우리에게 적용해보는 것이죠. 거인의 어깨에 올라가 자신의 세상을 꾸리는 것인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지식에 매몰되어서도, 집단 안에서 개인을 잃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자는 책 전반에서 언급합니다. 자신을 약간 예외적인 경우인 듯 겸손하게 말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지나친 집단주의에 경도된 우리사회에 지쳐있고, 취향이 존중받는 개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6. 글이 길었습니다. 마무리 하자면,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탐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작가는 생업에 종사하는 시간과 심미적 사유로 충만한 시간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는 철학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당면하는 문제들에 각자의 방식으로 대면하는 과정이라는 것를 성찰과 반성이라는 키워드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이는 데 있어서 따듯한 마음과, 언어와 사유의 품격을 겸비한 이 시대의 철학자의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찰과 반성이라는 키워드 말고도 발견할 수 있는 보석같은 주제의 글들이 많습니다. 이 긴 글을 읽으시는 것보다 더 쉽게 읽으실 수 있고,또 무겁지도 않은 책이니 한 번씩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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