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 저항한다는 것은 결국 마르크스의 영역에서 바탕을 두고 반격을 취하지 않을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아도르노가 등장할 여지가 생긴다. 현재까지 아도르노의 저술은 마르크스주의 예술사의 논의에서 중심이 되어왔으며, 추상예술을 옹호하는 아도르노의 입장에서 현대 예술 담론에 부가된 논의를 찾아볼 있다.

  아도르노는 재현적이거나 모방적 예술의 함정을 피할 아니라, 예술이 실재의  모방이 아니라 실재의 근본적 타자 radical other임을 강조하기 위해 추상예술을 옹호한다.

 

 예술이 자율적이고 대량생산된 문화(키치) 잠입에 저항해야한다는 아도르노이ㅡ 주장은 모더니스트 회화에 관한 클레멘트 그린버그 이론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린버그가 제기한 개별적인 예술매체의 순수성 혹은 능력의 영역 area of competence 개념은 아도르노 주장을 반영한다.

그러나 미적 형태 안에서 진리내용 지시하는 저항의 site으로서의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아도르노의 개념에는 공권력과 경제력의 남용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보다 첨예한 윤리적 분노가 담겨있다.

사회 대립하고 있을 조차도 사회의 부분으로 남아있는 예술은 사회에 대하여 눈을 감고 귀를 막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비합리성irrationality 그늘을 벗어날 없다. 그러나 예술 자체가 비이성 unreason 존재이유로 삼아 비이성에 호소하는 , 예술은 이러한 비이성이라는 저주를 신의 섭리로 바아들이는 신정론 theodicy으로 전환시킨다. .. 예술작품의 내용은 결코 작품들에 주입된 지성의 총합이 아니다. 오히려 아마 반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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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운동은 반자본주의 운동임을 표방하였지만, 자본주의적 현실관계를 뒤바꿀수는 없었다. 대신 의식과 사유의 영역에서는 자본주의를 부정할 있었다. 이처럼 부정하는 사유를 통해 열려진 의식의 공간에서 그들은 다양한 실험을 있었고, 과정에서 현실의 관계와 의식의 지향이 불일치함을 선명하게 확인하였다. 여기에서 예술은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에 대한 조급증을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킬 것이다

아도르노의 글은 모더니즘 논의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아도르노가 마르크스의 글에 관심을 갖도록 독려했던 발터 벤야민과의 친분은 아도르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편지

아도르노, 칸트, 전적으로 감각에 의존하는 쾌감은 예술이 가꾸어야 쾌가 아니라는 감관판단을 하엿듯이, 정신과 감각이 동시에 활동해~~내면에서 일어나는 쾌감. 관점에 따라 아도르노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재즈에 대해 그토록 엄격한 입장을 고수할 있었다. P.522 미학대계1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지만, 욕망의 민주화를 어디까지 용인해야할 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자신의 욕구를 끊임없이 상대화하면서 사는 일이 불가능한만큼, 나에게 거슬리는 타인의 욕구를 어디까지 수용할 잇는가, 경계 설정의 문제도 간단하지는 않다. 이보다 문제는 모든 것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조절해야 한다는 사실. 욕구에 대해서도 철학적 성찰이 요청되는 시대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은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이론 구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있다.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적당히(나름 순간엔 평타 이상의 노력) 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님. 예를 들어, 다가오는 2년 동안 유학 같은 것.

아, 철학자 정리: 가다머, 흄 등등등.


여름방학에 한 것: 공부, 만난 사람, 생각의 성숙, 운동, 몸건강상태와 상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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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의 굴레 안에서 돈을 매개로 하는 관계. 선의와 호의를 돈을 조건으로 함으로써 형성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특정 단면에 실망감을 느꼈다. 

이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일부인가...


그 안에서 성공해야겠다고.

좋은 게 좋은 것. 그걸 전제로 당연히 이루어지고 거기에 선의와 호의와 친밀한 관계가 기반할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음.

아니, 선의와 호의가 따를 수 있다면 그것도 은혜라는 것.


한 번 말해보기라도 하는 게 내가 할 일인 걸까-?-?.

Y를 20-30번씩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줄었던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늘려야지.

좀 더 그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의 장점을 확인하고

내 기준대로 그를 판단하고 대하지 말기. 


아니, 최소한의 판단을 하되

대함에 있어 차별을 두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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