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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랑할 줄 아는 동물이기에 인자하며, 배려하고 참는 것이다. 또 인간은 모든 관계에 있어 상대방을 인정하고, 필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든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마치 운동처럼, 인내심 또한 상호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나는 널 사랑하고, 그렇기에 배려하기 때문에 너의 행동을 참을 수 있어. 난 너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하며, 우리 사이에는 사랑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따라서 인내심에는, 서로간의 확실한 정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의 선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 인내심이 필요한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기적인 사람 앞에서는 수동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정서적인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 때문에 우리가 눈을 감고, 공감할 필요도 없다. 업신여기고 경멸하는 식의 폭력들은 모두 독하고 싸움을 불러일으키는 말들에 의해 발생한다.

이런 순간에 인내심을 갖고, 진실을 가리는 천을 벗겨내야 한다.

가끔 하나의 고통에 오래 머물다보면, 편입견과, 진부함의 구덩이로 떨어지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하지만 이런 실수를 저지르면 우리는 갖고 있는 상처에 감각이 멀어버려, 원래 가지고 있던 친절함과 인내심도 잃어버릴 수 있다.

용서하고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긍정적인 아우라를 표출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저질렀던 나쁜 언행들을 기억의 뒤안길로 향하게 만들 수 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누군가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도, 우리가 배워나가는 방법을 정하는 것도 다 우리가 스스로 할 일들이다.

또 남을 과하게 판단하려는 경향을 조절하는 것 역시, 우리 삶에서 일어날 고통과 나쁜 일들을 예방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장기적으로 이런 사고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일관적이고 공정한 사람이 될 것이며,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낙인을 찍거나 판단하지 말아라. 용서하고, 그들의 실수를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여겨라. 우리의 본질은 늘 최고의 방어 수단이며, 늘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이러기 위해서는 정신적 균형을 알고, 익혀야 한다. 우리 주변의 타인에서부터 나오는, 과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한 쪽으로 치워라. 또 한편으로 가지고 있고 겪었던 모든 좋고 긍정적인 것들을 끝까지 쥐고 가라.

누구도 곁에 있는 사람이 사라지거나, 우리의 성장을 막기를 원하지 않는다. 누구든 주변에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좋은 경험과 감정을 주는 사람을 두고 싶어한다.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하는 것 만큼이나, 웃게 만드는 것 역시 많음을 기억해라. 이 사실을 아는 것 만으로도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본질을 지켜라. 우리의 내면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지켜내라. 절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도록 해라. 배우고 받아들이기로 한 좋은 교훈일 때에만 스스로를 바꾸고 변화시켜라.

우리의 마음은 지금 이대로도 아름답다. 타인이 우리의 마음을 뺏거나, 우리의 인생을 분열시키도록 놔두지 마라. 내면의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고, 매일 발전할 수 있도록 해라. 이를 하되, 본질을 포기하는 것에 동의해서는 안된다. 본질이 없는 사람은, 군중 속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된다. 본질을 잃는다면, 우리를 아끼는 사람에게 우리는 흔한 사람 중 하나로 남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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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초의 법칙 

기구로 하는 근력운동은 어떤 것이든지 4초를 기준으로 하면 된다. 하나, 1초 만에 힘차게 바를 밀어낸다. 둘, 1초를 버틴다. 셋, 2초 동안 천천히 돌아온다. 호흡 방법은 힘을 줄 때 숨을 잠깐 참았다가 바를 완전히 밀어낸 동시에 ‘후’하고 숨을 내뱉는다. 돌아올 때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다음 동작이 바로 연결될 수 있도록 준비한다.
 
15회씩 3세트 
기구를 포함한 대부분의 근력운동은 15회씩 3세트부터 시작해 점점 늘려가도록 한다. 15회를 쉬지 않고 운동하는 게 한 세트다. 세트와 세트 사이에는 1분 정도 쉰다. 비만일 경우 쉬는 시간을 40~45초로 더 짧게 잡는다.
 
관절 구부리기 
팔다리 관절을 쓰는 근력운동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관절이 완전히 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무심코 팔다리를 쭉쭉 뻗다가는 관절에 손상이 가고 운동 효과도 떨어진다. 항상 관절을 조금 덜 편 상태로 운동을 이어나가도록 한다.
 
큰 근육 먼저 
가슴, 등, 하체 같이 큰 근육을 먼저 운동하고 어깨, 팔 등 작은 근육을 나중에 운동한다.



https://www.pycon.kr/2018/program/51


데이터 사이언스가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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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년 그람시의 문화 개념 <사회주의와 문화>


- 실증주의적 문화 개념 비판, 백과사전적 지식의 축적이라 생각하는 전통적 관점을 깨뜨려야. 어떤 양의 사실과 자료들 기억해왔기에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을 우월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라들에 대해 문화적 장벽을 쌓는 것을 도울 뿐.

- 어떠한 사회집단의 정치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집단의식 형성 없이는 불가능하고, 이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준비가 필수적

- 프로레타리아 혁명은 총체적일 수 밖에 없음. 사회주의는 삶에 대한 총체적 전망. 자신만의 신념, 철학, 도덕을 지니는 새로운 정신적 습관을 창출해내는 사회의 총체적 변혁이며, 이는 새로운 집단의지를 창조해 냄으로써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다.

-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획득하는 문제와 더불어 정신적 권력을 획득하는 문제 또한 반드시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로렐타리아는 스스로를 정치경제적으로 조직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 조직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2. 국민적-대중적(nazionale-popolare) 문화개념


- Q: 왜 이탈리아에서는 국민적-대중적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가? 왜 이태리 문학은 대부분 자국내에서 광범위한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하며, 왜 신문들은 외국의 소설, 주로 프랑스 소설들을 연재소설로 싣고 있는가?

- A: 이탈리아에서는 작가와 대중, 지식인과 광범위한 국민-대중 사이의 유기적 통일이 전혀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것. >>> 언어의 문제와도 관련됨. 이탈리아에서는 국민적이라는 말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제한된 의미 가지고 있어서 어떤 겨웅에든 대중적이라는 말과 일치 하지 않음 강조. 이탈리아에서 지식인들은 대중, 즉 국민으로부터 소원하며 그들은 특권적 전통과 결부됨. "대중들의 기본적인 열정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않고,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것들을 설명, 정당화하지 않고 최고의 세계관과 역사법칙, 즉 지식에 변증법적으로 연관시키지 않고서도 지식일수도 있다고 믿는" 오류를 범함. 


모든 차원에 대중국민이 문학에 관심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토착적인 지적 요소를 외국인보다 더 이질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 해외작가의 작품 선호한다는 사실, 대중국민이 해외지식인들에 보다 밀접한 연관된 것으로 느낀다는 것. 어떠한 국민적인 지적 도덕적 블록도 존재하지 않음 의미.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대중과 지식인의 유기적 통일 통한 국민, 대중적 문화의 형성 및 대중의 지적 도덕적 개혁을 통한 해게모니 획득 강조. 이를 위한 운동의 출발점은 대중들의 일상적 상식과 대중문화로부터 출발해야 함 강조. 


3. 문학에 대한 그람시의 견해


- 방법론적으로 크로체에 의해 외곡되어 계승된 데 상티스의 해석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 데 상티스의 사상 그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핵심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문화는 일관되고 통일적이며 국민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인생관과 인간관, 세속적인 종교, 문화가 된 철학-윤리-생활방식, 시민적 개인적 행동규범을 산출하는 철학을 의미하는 것. 무엇보다도 민중에 대한 새로운 태도 요청. 크로체의 개인주의적이고 반역사적인 미학적 입장과는 분리될 수 밖에 없음. 데 상티스에게 문학의 본질은 직접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체로 인식된 형식.  이탈리아 문화속에서 그 자신의 비평활동에 부여했던 국민적, 대중적 경향인 바. 데 상티스를 통해 국민적 대중적 문학비평의 방법론적 기준을 찾아냈다. 


이렇듯 데 상티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그람시는 크로체의 사상에 대한 검토와 비판을 수행했다. 크로체의 초기 미학이 예술가 내부로부터의 직관과 같은 정신적 활동에 주요 관심이 놓여졋던 반면, 그람시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예술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기능에 주목하는 것이다.


또한 크로체의 이론이 예술적 창조행위의 정신적 측면에 집중한다면, 그람시는 구체적인 현실세계 속에 존재하는 예술의 역사사회적 함의와 기능에 초점. 


크로체는 예술의 역사와 문화이 역사 엄밀히 구분, 예술사는 개별 작품의 역사이고 이는 유일하게 적절한 미학사의 종류라고 한 반면에 문화는 경향, 장르, 예술가들의 삶, 지적인 배경, 예술에 대한 관념 등의 역사라고 설명. 크로체의 관점에 다르면 이러한 문화사는 개별 예술자궆ㅁ과 그것의 아름다움 설명하는 데 있어 아무런 실재도 지니지 않는 것.


그람시는 이를 비판. 예술적 영역과 역사적 영역 사이 대화의 모든 가능성 닫아버리고 필연적으로 반역사적인 미학적 입장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 


다른 한편 그람시는 속류 유물론주의적인 문학과넹도 단호하게 투쟁. 만초니 베르가 셰익스피어: 민중적 인물에 대한 작가의 태도. 만초니와 셰익스피어 부르주아나 평범한사람들 무대 위에 올리지만 조롱혐오재현되며 웃음거리 됨. 


작품에 대한 도덕적 비평과 미학적 비평 구분해야 함. 즉 사상가로서 작가와 예술가로서 작가 구분해야할 필요성 강조. 즉, 미학적 예술적영역 // 정치비판, 사회적 삶에 대한 비판 문제 구분.


문학에 대한 문화사적 연구와 예술비평적 연구 차별성에 입각해 예술비평의 문제를 문화사적 연구로 환원시켜버린단 점에서 속류 실증주의적 유물론 문제점 인식.


그람시의 역사주의적 이해: 문학/사회, 예술/역사, 이론/실천이라는 전통적 이분법 구분 극복하는 방향으로 방향 열음. 


c.f. 이태리아 낭만주의는 존재했엇나?, 그람시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지식인과 대중 그리고 민족 가의 특수간 관계 또는 결합 의미. 넓은 의미에서 민주주이ㅡ의 반영. 낭만주의는 이태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이름을 얻은~ 에 동반, 선행, 승인 발전시킨게 낭만주의... 


4. 그람시의 대중문학 분석


- 그는 대중적인 상업문학을 정확히 문화사의 관점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감정과 세계관에 있어 침묵하는 다수 속에서 대중이 지배하는 시대의 철학의 지표로 파악. 새로운 문학이 미래주의 운동처럼 인텔리 출신의 예쑬 조류에서 나올 수 있단 생각을 잘못된 편견이라고 신랄하게 비판. 

: 대중소설들에 대한 경험적 분석으로 나아가 대중문학의 분류와 발생 요인, 지배적 유형, 각각의 대중문학의 하위 장르를 즐기는 수용자에 대해 분석. 그는 대중 문학을 연재/추리/모험/과학/유토피아철학/전기 소설 등으로 나누어 설명... 나아가 대중소설의 지배적 유형에 대해 연구통해 대중들의 근본 취미 변화 확인코자 함.


대중의 수용을 통해서 야기되는 도덕적 감수성의 문제로 초점이 이행. 결국 예술을 통해 표현된 것으로서의 돋거성은 어떤 영원한 원칙들의 체제가 아니라 작품과 대중과의 접초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역동적이고 역사적인 과정. 


그람시는 대중문학의 성공과 인기란 그것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민중적인 내용에서 비롯된다는 점 강조. 비록 민중들은 몽매한 상태에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작품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는 까닭은 그 이면에 사람들에게 진정한 민중적 즐거움을 안겨다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수용과정을 통해 대중들이 그러한 민중적 이념과 희망을 추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속물근성도 있지만 민주적인 엶망의 토대도 충붆 찾아볼 수 있기 때문.


더 나아가 그람시는 테일러주의와 기계화에 의해 유린당한 인간의 삶에 있어 합리화라는 미명하에 중산계급과 지식인에게까지 위협이 밀어닥치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모험의 몰락이 아니라 일상생활이 주는 너무나 큰 모험성 즉 삶에 있어 너무나 큰 불확실성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름답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갈망하는 까닭은 현실생활로부터 일탈이라는 모험이 제기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주어지는 야만적이고 거부감느껴지는 모험과는 반대로 자유로운 주도권을 지니는 모험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론의 이론가들과 달리 대중문화의 유행과 성공의 원인을 냉정하게 짚어봄으로써 그것의 긍정적의미또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한 모험이 주는 긍정적 지점은 자신의 삶보다 한층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삶에 접촉함으로써 자신을 교육시키길 원하고 이상적인 모델을 머리 속에 그려봄으로써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키려는 바람. 더 나아가 어떠한 생활조건 속에서 가능한 것보다 더 많이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는 바람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람시는 대중문학이 주는 즐거움이 단지 허위적이거나 도피적이게 만드는 마취제나 아편같은 부정적인 측면 뿐만아니라, 대중들의 현실적인 욕망을 채워주고 이상적인 모델을 그려줌으로써 그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역할 또한 강조한다. ...새로운 주체의 형성, 종속집단이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으로 발전하는데 있어 이러한 대중문학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인 힘, 이른바 저항적 즐거움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1. 동남아시아 참여적 지역주의와 동아시아 공동체 / 전제성


* 핵심 정보 제공(key informants): Forum-Asia의 Anselmo Lee이성훈 소장과 CSIS의 Hadi Soesastro 소장. 


지역적 차원의 정부간 협력 과정에 대해서도 참여활도잉 필요하고 가능하다는 것을 동남아의 시민사회가 asean에 대한 개입활동을 통하여 가까운 선례보임. 2000년 아세안 국민회의 APA asean ppl's assembly 결성되어 2006년까지 다섯 차례 대회 성사시키더니, 결국 아세안의 공식적 자문기구로 인정받기에 이름. 


2006년에는 동남아에 본부를 둔 초국적 시민사회단체들(?뭐지?)이 주도하여 아시아시민사회연대회의 결성. 


싱가포르의 국제정치학자 아미타브 아치리아, Amitav acharya 2003, 사회세력과 이익집단이 참여하여 엘리트 중신적인 지역협력을 민주화하느 것을 참여적 지역주의participatory regionalism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본 논문은 이를 apa와 sapa사례 통해 분석하는 데서 출발함. 


시민사회 관련 연구 대부분 일국의 국가-사회 관계에몰두. 지역협력 관련 연구자는 정부간 협력에 주된 관심두며 시민사회 참여를 포괄해야한다는 당위 수준의 주장을 장식처럼 부연할 뿐. 


>>> 국제관계연구와 동남아지역연구에서 비국가행위자의 참여과정에 관한 연구. 한국입장에선 참여지역주이가 정책적 관심사항이기도 함.

동아시아 지역협력에 있어 아세안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바 있음. 


여기에 더해, 시민사회의 참여적 지역주의 역시 동남아가 앞서고 있음 밝히고 이 선례를 동아시아 공동체 추진의 교훈으로 삼자고 주장하고자 한다. 


apa출범시킨 인도네시아 국제전략연구소 CSIS, 방콕은 SAPA출범시킨 역내 최대 인권운동단체인 포럼아시아 염두해두고 2007년 현지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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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9 인도네시아 민주화 덕분에 가능. 세계자료연구소(WRI, World Resource Institute)의 집계에 따르면 동남아 10개국의 비정부기구 및 시민사회단체의 수는 2000년에 1만1천개를 넘어서서 1990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Chandra 2004: 160). 이와 같은 시민사회단체의 양적 증가와 함께 지역을 활동무대로 삼는 단체네트워크운동조직들(umbrella organizations)의 활성화도 APA형성의 좋은 조건이 되었다. 또한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필두로 지역에 및어닥친 경제위기?로 인해 민중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화되던 상황도 아울러 APA형성의 국면적 계기로서 언급할만하다. 동남아가 경제위기를 전후하여 연무, 테러, 지진해일, 조류독감과 에이즈의 확산 같은 초국가적인 지역공동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 역시 APA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침에 집어들어서 두어시간 정도동안 읽은 책. 박영욱 선생님이 참가하셔서 샀는데, 좋은 내용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감정표현이 과해서 아쉬운 책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세월호 사건을 둘러싸고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양분된 의견들이 갈등하는 지 모르겠다.

잘못된 건 밝히고, 왜 당장 구조하지 않았는지, 왜 인양하지 않았는지, 사건이 터지고 대통령을 뭘 했는지.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생각은, 이 사건을 사고로 간주하고 한해에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만 몇만명인데-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

이건 정부에서 응당 즉각적으로 대처했어야 했고, 그 미흡한 대처로 인해 한번에 삼백여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시시각각 보도되었다. 가라앉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육지의 사람들이 함께 했다는 거다.


p.11 배타적 편향성을 부채질하는 편향적 유대 문화의 가공할 위력. 제대로 된 앎이 이루어져야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 도덕적 직관주의 / 공감의 확장. 앎의 쓰임은 인지적 차원에만 있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도덕적 직관이 공감의 형식으로 공명할 때 비로고 구현 가능. 


김성우, 일제 강점기와 분단, 한국 전쟁 모두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 말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온누리교회 목사. 이슬람, 미국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다를 바 없어. 테러, 학살, 침략을 신의 계시, 사명으로 생각하는 것은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


신약성서의 어느 부분에서 예수가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적 있는가. 예수는 도리어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니님에게 라고 말하며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뒤섞지 말 것을 요구한다.


연효숙, 김장훈의 진실성: 죽은 이보미양이 부른 거위의 꿈 영상에 자신이 부르는 영상 편집해 합성.


주디스 버틀러- "애도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폭력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삶에 대한 더욱 예리한 느낌을 잃게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박영욱, 역시나 다양한 장르(미술)을 오가며 철학적 개념을 사건을 둘러싼 논의에 적용. 사회 표면에 감춰진 무의식. 러시아 구성주의자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 객관과학적 세계관을 카메라가 대변한다고 봄. 에이젠슈타인 몽타주 영화 거부함. 리시스키, 타틀린, 긴즈부르크 등이 기하학적 추상 몰두한 것도 형태야말로 가장 탈주관적이고 과학적이라고 믿었기 때문. 


호르크하이머 등 독일 비판이론가들의 테제가 보수 논리 되어버린 현실. 그것이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 오늘날 미디어사회에서 여실히 드러남. 그들, 미디어가 대중 비판의식 고갈시키고 천박한 포퓰리즘 도구가 되었다고 함. 진보는 반대로 현실 고발 강조. 그러나 미디어 그 자체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야.


일베충이 혐오하는 건 정작 보수/진보라는 잣대일 것. 그들에게 혐오의 대상은 오늘날 병폐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면서도 모든 원인 보수세력으로 돌리는 진보진영. 보수가 대놓고 꼴통 짓 한다면 진보는 사회악 만드는데 일조하면서 모든 악을 보수로 몰아붙이는 위선적 행위한다고 생각. 이를 냉소와 혐오로 표현하는 것... 안희정, 이재명만 봐도...


데리다가 언급했듯 햄릿의 유령은 그저 헛된 망령이 아닌 햄릿 자신의 내면이자 실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데리다에게 마르크스의 유령은 허구가 아닌 자본주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실상일 것. 트라우마된 것은 미디어 탓이 큼....이라는데 사실 그닥 트라우마가 아니라... 모든이에게 트라우마라고 생각하는 것도 좀 불편했음. 제일 좋았던 글 두개 중 하나긴 했지만, 중간중간 모든 사람들이 그정도의 충격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거라 단언하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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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5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을 감시와 처벌의 시각으로 보는 정치권력은 자신의 존립 기반을 망각한 권력. 


최종덕 샘 글도 좋았음. 은폐와 광신의 정치학

1. B6, D, E, 마그네슘 이 PMS관련해 전문가들이 섭취할 것을 추천하는 비타민인데, 칼맥이 D랑 마그네슘이라 되게 좋은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모두 혈행개선과 관련된 제품이니만큼, 땀뺴는 운동으로 혈액순환하는 거 중요하다는 말이니...!

이렇게 비타민 먹고 하니, 몸에 좋은 것만 이제부터라도 꼭 넣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좋은 거 먹는데 다른 이상한 걸로 오염시키기 싫달까.


그나저나 확실히 어제 무겁게 먹은 것도 아닌데, 특히 저녁 먹고나서부터 소화가 안되가지고 계속 헛트림을 많이 한거같다.

운동할 때 거기 바지가 배에 꽉 끼어서 그런가- 그런데 지금 아침에도 바디키랑 우유 타먹고 나서 소화안되는 기분이 불쾌하다 ㅠㅠㅠ

왜이러는거니...


2. 생리 시작 한 주 전: 최악

생리 시작 후: 괜찮음.

생리 끝난 후 1주일: 최최악


이런 여성호르몬의 사이클에 빠져 내 할일을 하는데 큰 지장을 받다보니, 얼른 완경하고싶다(..)는 생각부터

남자로 태어났다면 이런 걸로 시간낭비 안해도 되었을텐데- 라는 생각까지 든다.


https://brunch.co.kr/@medicalwriter/25


관련해서 좋은 정보가 있는 것 같아 적는데, 뭔가 적혀있는 걸 보니 지엘에이 블랜드는 생략해도 될 것 같음!

그리고 보니, 이번에 운동꾸준히 하면서, 확실히 오후 3-4시에 피곤한 게. 오후 8-9시로 밀려나고, 잠도 5-6시간 자도 앞의 시간대에 피곤해진다!


지금 아세로라 C랑 칼맥 디를 먹고 있는데, 직감적으로 몸이 밝아지는 게 느껴진다.

예전엔 비타민먹고 오히려 소화안되고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는데,

다 화학물질(석유찌꺼기)로 만든거라 간에서 해독하느라 더 피곤했던거구나 ㅠ 느낀다.


모쪼록, 생리할 때가 되었는데 안하기도 하고...

내가 그럴 일은 없지만 하루이틀 늦어질 때마다 괜히 불안해진다.

이것도 스트레스라 싷음.


생리가 다가오는데 한두달전까지만 해도 계속 느끼던 가슴통증이 안느껴져서

이게 운동효과인가 아니면 라니아 효과인가 싶기도-.


나도 이 글에서 나오는 것처럼, pms방지하는 생약=프리페민을 3달 5만원정도해서 두달 반 정도 꾸준히 먹었는데

딱히...노답이라 안먹고... 어느정도 기분에 효과있는 라니아를 먹고 있는데,

운동도 하고 하니 그만 먹을까 싶다.


3. 자궁을 튼튼하게 하자ㅠㅠ 흑흑 무섭구려:

소화장애, 편두통 등… 알고 보면 ‘자궁’이 문제일수도

http://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22/2010032201312.html


스트레스, 혈액순환 부족 등 원인 찾아내 근본 치료해야 ‘동의보감’에서는 냉대하의 원인을 크게 기허와 습열로 보고 있다. 먼저 기허로 인한 경우에는 전신이 허약해 기운이 없고 쉽게 피로하며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이때는 늘 하복부가 차고 골반 내 혈액순환도 잘 안 돼 자궁이나 난소의 기능이 원활하지 못해서 냉이 많아진다. 또한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지만 스트레스를 잘 받고 예민한 사람들은 습열로 인한 대하가 생기기 쉽다. 이 경우엔 음부가 아프거나 가렵고 소변 보기가 힘든 증상을 수반한다. 한의학적 치료는 감염에 의한 발생이든 신체 기능의 저하가 원인이든 일단 인체의 생기를 먼저 보(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즉 냉대하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궁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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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42

 

 I can also talk a bit about my own projects in Southeast Asia. I began working in Myanmar in 1997 and have continued to produce work there consistently. At present, I'm supporting young intellectuals who are developing independent research in educational and post-traumatic activities for young children and novice monks who were affected by the Nargis cyclone disaster in 2008 and the wave of state terror unleashed after the saffron uprising[protests led by monks] in 2007.


 I'm waiting for the next round of funding to start a technology-based project that can be used to conduct educational activities and promote skills in information technology, with the intention of spreading knowledge that can be used to circumvent state control of communication systems in Myanmar. These activities are carried out under the concept of the Open Academy, which began in 2003 as an activity if NICA. It's a culture and art program with processes devoted to open learning and resource development. 

미학대계 2: 1920년대 정치적 상황 및 이론사적 상황과 철학의 문제: 잃어버린 혁명


 p.722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직후의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희망찬 확신과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피살로 마감되는 독일에서의 스파르타쿠스 사건을 마지막으로, 1920년대 들어 서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지연, 불발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실종될 조짐까지 보이게 된다. 서유럽 선진 국가들 가운데서의 자본주의 사회가 노정할 수 있는 모든, 정체/경제적 위기 상황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

이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여성혁명가

[Rosa Luxemburg]

출생 - 사망1871.3.5. ~ 1919.1.15.

1919년 1월 15일 베를린. 150cm가 넘을까 말까 한 신장에 다리가 불편한 한 40대 여인이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휘두른 총의 개머리판에 두개골이 으스러지도록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그대로 다리 위에서 운하로 버려졌다. 독일의 11월 혁명 정국 속에서 우파 의용단에게 살해당한 이 왜소한 중년 여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그녀는 20세기 초, 러시아와 독일의 혁명을 주도하며 새로운 자유와 평등 사회를 꿈꾸던 정열의 혁명가이자 마르크스 이래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일컬어지던 탁월한 이론가였다.

타협을 모르는 불굴의 이상주의자

 이미지 1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그녀가 몸담았던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획득했던 시기였다. 그녀를 살해한 군인들도 11월 혁명을 이끌어 제정을 무너뜨린 세력이었다. 얼핏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노선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세력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서둘러 체포하고 재판도 없이 무참히 살해한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인물이 가진 타협을 모르는 순수 사회주의 사상과 그녀의 폭발적 행동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집스러울 만큼 자신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혁명을 제대로 된 방법으로 100%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상적 혁명 달성은 공감하지만 과정의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라던가, 혹은 시대가 변했으니 그에 맞게 이론을 새롭게 수정해야 된다는 주장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에 맞서 순정한 혁명정신을 부르짖었다.

그녀는 순수한 국제주의자였으며 평등주의자였고 민주주의자였다. 그러기에 그녀는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계급해방의 노선을 택했고, 혁명달성을 위해 직업적 혁명가의 독재를 정당화하던 레닌과 맞섰으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사회주의 이론을 수정,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것을 주장한 베른슈타인과 이론 투쟁을 벌였다. 그녀는 노동자 스스로가 만든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세계를 꿈꾸었으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대다수 그녀의 동료들은 상황과 자기논리에 맞추어 변해갔고 결국,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그녀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결국 그녀가 독일 사회민주당과 결별해 독자적인 급진적 혁명당 스파르타쿠스단을 만들고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민주당과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위태로웠던 공존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한 세력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적들과 동료들이 두려워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꿈꾼 세상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녀가 옥중에 있으면서 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써놓았다.

인간다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것은 확고하고 명쾌하며 명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랑하다는 것을요. 흐느끼는 것은 약하다는 표시예요.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화창한 날을 맞을 때마다, 아름다운 구름을 볼 때마다 그것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러시아 식민지 폴란드에서 태어난 다리를 저는 유태인 여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세계사를 뒤바꿀 거친 혁명의 세계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출신과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던 나라 폴란드(당시는 러시아의 식민지였다)에 사는, 유럽인들로부터 천대받던 유태인(그렇지만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다. 이것 또한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이론가의 출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이었고 여성의 인권이 가정에서부터 존중받지 못하던 19세기와 20세기 초를 살아가는 여성이었다. 거기다 어렸을 때 앓은 병으로 다리가 불편하였고 그 탓에 신장도 그다지 크지 않은 왜소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자신의 불리한 입장과 연약함을 무기 삼아 가정에 눌러앉아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로자 룩셈부르크였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핸디캡을 극복하고 이를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폴란드의 유태인이란 그녀의 출신은 일찍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민족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국제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게 했고 불편하고 왜소한 몸과 여성이라는 입장은 그녀를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계층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하여 당시의 혁명가나 이론가들이 쉽게 유혹받던 왜곡된 권력욕으로부터 그녀를 해방시켰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청소년 시절 명석하고 뛰어난 두뇌로 이미 6개 국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던 우수한 학생이었던 한편, 식민지 폴란드를 탄압하는 제정 러시아에 항거하는 반정부운동에도 일찌감치 가담하고 있었다. 고교 졸업 무렵 수배대상이 된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을 하게 되고 그곳 대학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땄다. 또한, 그녀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레오 요기헤스를 만났고 본격적인 사회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98년 구스타프 뤼베크란 독일인과 위장 결혼하여 독일시민권을 취득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2차 인터내셔널에 참여하게 되고 사회주의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러시아의 1차 혁명에 고무받아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로 돌아가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면서 폴란드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과 반목하였다. 국제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족주의를 매우 경계하였는데 그녀는 민족주의나 민족의 독립이란 미명이 계급의식을 흐려 결국 계급해방을 방해하고 국가간, 혹은 민족간 이기주의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매우 정확하게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폴란드의 독립보다는 계급 해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에 대해 일부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그녀가 폴란드의 독립을 방해하기 위해 러시아 짜르가 보낸 첩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이 폴란드에서의 활동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베른슈타인과 레닌에 맞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수정주의 논쟁을 펼친 베른슈타인. 
<출처 : St.Holz at en.wikipedia.org>

이에 앞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의 사회민주당 내에서 당내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던 베른슈타인과 이론 논쟁을 펼쳐 그의 수정주의 노선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베른슈타인은 엥겔스의 친구로 마르크스 사후 독일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베른슈타인을 상대로 20대 후반의 로자는 끈질긴 이론논쟁을 거듭하며 그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란, 자본주의의 자기발전과정을 인정하고 그에 맞추어 마르크스주의를 수정 적용하자는 이론이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자체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정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곧이어 붕괴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신용제도, 카르텔, 트러스트, 완벽한 통신기술 등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적응수단 때문에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고 지속될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노동자들의 무장봉기나 급진적 혁명 같은 물리적인 방법보다는, 개선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조합이나 의회 진출 등을 통해 비판세력으로서 사회주의를 적용하고 점진적 전진을 통한 권력 획득을 주장하였다. 이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라는 논문에서 혁명의 필요성을 사회주의의 정설로 항변하고, 베른슈타인이 말한 의회 진출을 통한 점진적인 사회주의 권력 장악은 공상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이 말한 자본주의의 적응수단이야말로 신속한 자본주의 발달과 이에 따른 자기모순에 의한 붕괴를 초래할 요인이며, 식민지 등 자본주의가 착취할 영역이 더 이상 없어지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붕괴는 필연이라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을 더욱 첨예화하여 혁명을 통한 권력 획득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장이었다. 노동조합이나 의회 진출 등 수정주의의 방법론은 노동자를 노동의 영역에 제한함으로써 그 정치적 힘을 박탈하여 자본주의를 돕고 혁명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비판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당 조직론에 대해 논쟁한 레닌. 
<출처 : SF007 at en.wikipedia.org>

그녀는 사회주의로의 길은 오직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 즉 혁명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눈앞에 현실보다는 이상에 바탕을 둔 확고하고도 순정한 그녀의 주장은 제2인터내셔널에서 받아들여졌고 수정주의는 사회민주당의 공식적 노선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변화하는 시대상 속에서 수정주의는 실제적인 노동 현장에서 계속 그 명맥을 이어갔고 급진적이고 물리적인 혁명에 회의하던 상당수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로자 룩셈부르크의 결벽증에 가까운 노동자 중심의 혁명이론은 레닌 비판에서도 나타난다. 레닌이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직업적 혁명가에 의한 혁명 주도와 정당조직의 규율화를 강조한 데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많은 우려를 표명했다. 그녀는 모든 혁명은 엘리트혁명이 아닌 대중운동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대중에 의한 파업과 운동은 객관적인 사회상황에 대한 반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화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혁명이 이루어지리라고 본 것이다.

그녀는 레닌의 혁명이론이 볼셰비키의 독재와 관료화로 흐를 것을 경계하였고 실제로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 이루어내는 혁명의 가치를 가장 고귀하고 숭고하게 생각한 혁명가였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범하는 오류는 가장 우수한 중앙위원회의 완벽성보다도 역사적으로 훨씬 더 풍요롭고 귀중한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해방이 아니면 안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스파르쿠스단의 결성과 최후

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연설에서 당시 독일의 황제이던 빌헬름2세를 비판하였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1년간의 옥살이 후 출소한 그녀는 새로운 정치적 전개를 목도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전부터 늘 경계하던 민족주의와 수정주의가 한꺼번에 독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팽배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세계전쟁이었다. 국가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당장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와 민족의 안위에 대범할 수 없었던 독일의 사회민주당원들은 계급문제를 뒤로한 채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사회민주당은 전쟁을 지지하는 독일사회민주당과 그렇지 않은 독립사회민주당으로 분열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적기>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훼절된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논설을 써서 그들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급진적인 혁명파들의 중심에 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과거 로마시대 노예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딴 스파르타쿠스단(독일 공산당의 전신)을 결성하고 급진적 혁명을 위한 활동을 해나갔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11월 혁명이 일어난다. 이 혁명은 패전책임론과 사회주의자들의 반발, 전쟁으로 인한 민중들의 궁핍 속에서 킬 지방의 수병들의 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제정은 무너졌고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혼란스러운 혁명정국에서 정권을 잡은 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우파들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장례식중 장례 행렬 모습. <출처 : German Federal Archives>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순정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불완전한) 혁명정국으로부터 단숨에 노동자 중심의 온전한 혁명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19년 1월 1일 스파르타쿠스단을 독일 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사회민주당을 돕는 우익 군인들의 손에 진압되었다. 많은 급진적 혁명가들이 체포되는 과정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베를린 경찰 최고직을 장악하고 있었던 보수적 의용단(Freikorps)에 잡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체포된 후 심한 욕설을 들으며 개처럼 끌려 다니다가 머리를 강타 당하고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시신은 운하 속에서 잠겨 있다가 그해 5월에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은 나치의 집권기에 한 차례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90여 년간 꾸준히 그녀의 이상을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2009년 베를린의 한 병원 지하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으로 보이는 시신 한 구가 발견됨으로써 현재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 그녀 본인의 것이냐는 논쟁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사상이 한물 간 유행가처럼 들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품고 죽은 탁월한 혁명가로 기억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로자 룩셈부르크가 최후로 쓴 글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 - 이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여성혁명가 (인물세계사)


맨날 핸드폰 앱으로 성형된(...) 얼굴을 보다가,

핸드폰 액정 고장나서 근 이삼주간 현실의 얼굴을 거울로 많이 보는데

적응이 안된다...원래 이렇게 못생겼었나...ㅠ


그런데 포토샵도 포토샵이지만,

예전에도 거울볼 때 이러진 않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살이 쪄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진짜 뭔가 사랑받고 잘 보이고 싶은 누군가가 없는 건 정말 나를 덜 아름다워지게 하는 것 같다.


결론 = 존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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